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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May 07. 2024

흉터를 사랑합니다

왼발 화상 후 깨닫게 된 사랑

시골에서 자란 탓인지 유독 제 몸에는 흉터가 많습니다.

동네 개울가에서 수영하다가 다친 상처부터 산이고 들이고 뛰어다니며 놀다가 생긴 상처들이 전리품처럼 몸 구석구석 흉터로 남았습니다.

그때는 아팠지만, 흉터들이 가진 사연들을 떠올리다 보면 가끔 뭉클해지는 추억을 만납니다



제 왼쪽 발등에는 화상 흔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자세히 살펴봐야 겨우 찾을 정도로 희미해졌지만 제겐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기억됩니다.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작불을 지펴서 가마솥에 밥을 해 먹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숭늉을 가져오라는 심부름이 내키지 않아서 속으로 투덜거렸습니다. 

부엌으로 갔더니 그때까지 장작이 타고 있어서 가마솥뚜껑까지 뜨거웠습니다. 

손잡이를 행주로 감싸서 열었더니 뜨거운 김이 훅 올라와서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커다란 국자로 숭늉을 퍼담아 들고 오다가 문턱에 걸려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어쩐지 가기 싫더라니... 

그 순간 숭늉 그릇을 놓쳐서 왼쪽 발에 쏟았습니다. 

''악!" 

누구한테랄 것도 없이 원망이 훅 올라왔습니다. 

동시에  심한 통증 때문에 소리 지르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내 울음소리에 놀란 아버지가 달려오셨고 내 발을 보더니 바로  읍내로 달려가셨습니다.  

엄마도 아파하는 나를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허둥거리셨습니다.

한밤중이라 병원은 문을 닫았고. 읍내 약국 문을 두드려 화상 연고와 진통제를 사 오셨습니다. 

연고를 바르고 진통제를 먹고 나니 겨우  통증은 진정되었고 그 밤은 그렇게 지났습니다. 문제는 다음날 등교였습니다.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겨우 걸음을 옮길 정도라 읍내에 있는 학교까지 혼자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등교는 아버지가, 하교 때는 동네 친구들이 리어카로 태워 왔습니다. 

오가는 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 핑계로 결석했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결석은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부모님께 반항할 깜냥은 못됐습니다.



그날부터 읍내까지 30여 분 거리를 리어카로 등하교하는 진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하시며 바빴지만  모든 일을 제쳐두고 리어카로 학교에 데려다주었습니다. 

행여 학교에 늦을까 봐 읍내까지 뛰다시피 해서 리어카를 끌었는데 목덜미에 맺힌 땀방울과 거친 숨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때까지 아버지가 무서워서 마음을 닫고 지냈습니다.

화상을 입고 울던 날,  누구보다 먼저 내게로 달려와주셨고 , 한밤중 읍내를 한 달음에  달려 나가서 닫힌 약국 문을 두드려 약을 사 오셨습니다.

그날 이후로 닫혔던 마음이 서서히 움직였습니다.

회복될 때까지 매일  땀을 흘리며 리어카로 데려다주시던  아버지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다가왔습니다.



돌아보면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아버지는  교과서를 달력으로 포장해 주고, 연필을 일일이 깎아서 필통에 넣어 주셨는데 그때는 당연하다 여겼습니다. 

하루 종일 들에 가서 일을 하고 돌아오신 밤에도  한글과 숫자 공부는 아버지의 몫이었습니다. 

책상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숨겨둔 왕사탕을 입에 넣어주셨는데 그때 느꼈던 달콤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나의 일상을 지켜주고 있었지만, 공기와 물의 소중함을 모르듯 항상  베풀어주신 그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화상의 상처는 아프고 불편했지만 내 마음속 벽을 허물고 아버지와의 화해를 이끌어 줬습니다.

동네 친구들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면서 티격태격 말도 많고 탈도 많았는데 내 상처를 함께 아파해주고 내 발이 돼주었습니다.

남들을 신경 쓰는 사춘기라 리어카를 끄는 것이 부끄럽고 번거로웠을 텐데 친구들은 싫은 내색 없이 하굣길 도움을 자처했습니다. 

내리막길에서는 스피드를 즐기며 함께 노래하면서 즐거웠습니다. 


리어카에서 해방되던 날 엄마가 음식을 준비해서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했습니다. 돌아보니 친구들을 오해한 것도 편견에 사로잡힌 속 좁은 내 마음 탓이었습니다. 

어려울 때 두말 않고 나서준 우정에 울컥했습니다. 


화상을  불행이라 여겼는데 그 일을 계기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흉터만큼이나 저는 인덕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왼발 흉터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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