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무너지지 않고 삶의 무게를 소화해 내는 심리적 공간
차 안엔 적막이 가득하다. 야속하게 빨리 스쳐가는 바깥 풍경을 응시한 채 젊은 사내의 표정에 생기가 사라져 간다. 간간이 내뱉는 한숨이 그의 심정을 가늠하게 한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그 한숨은 체념이 섞인 짧은 숨으로 바뀐다.
손꼽아 기다리던 아들이 짧은 휴가를 나왔다가 부대로 복귀하는 시간이다. 부디 잘 버텨내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단단히 안아준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군복이 마치 아들의 마음 같아 아려온다. 아쉬운 인사를 나누며, 무거운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안쓰러움이 밀려온다.
광역시로 자대 배치를 받아 왠지 모르게 안도가 되었지만, 그래도 군대는 군대인 것이었다. 왜 집과 가까우면 군생활도 수월할 것이라 착각한 것일까. 모든 군필자라면 공감할 군대, 가장 무서운 악몽이 다시 입대하는 꿈이라니 그곳이 얼마나 힘든 공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내 아들은 지금 군에서 버텨내고 있는 중이다.
아들의 모습은, 내 SNS에서 꾸준히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버텨내기’라는 글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내 글이 많은 사랑을 받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조회수가 올라갈 때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각자의 삶을 버텨내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안타까워진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강박적으로 "참으라"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취업이 안 되는 청년세대부터 팍팍한 직장생활을 하며 자녀들을 양육하는 장년세대, 노년세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묵묵히 하루를 버텨내며 살아간다. 마치 고통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것만이 유일한 미덕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강요된 인내는 종종 힘이 아니라 '자기 폭력'의 한 형태일 때가 많다. 그렇다면 삶을 진정으로 "버텨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유명한 정신분석가 윌프레드 비온(Wilfred Bion)은 진정한 인내와 단순한 억압을 구분했다. 그는 이를 '담아내기(Containing)'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진정으로 버틴다는 것은 고통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외부에서 습격해 오는 불안, 무력감,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즉각적으로 터뜨리지 않고, 일단 멈춰 세워 '사고를 위한 마음의 공간' 안에 머물게 하는 능력으로 정의했다.
울고 있는 아기와 엄마를 떠올려 보자. 아기가 견딜 수 없는 불안을 투사하며 소리 내어 앙앙 울 때, 엄마는 보복하지 않는다. “에구, 우리 아가가 배고팠구나. 그래서 우는구나~ 엄마가 쭈쭈 줄게~” 엄마는 아기의 불안을 흡수하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소화(metabolize)시킨 뒤, 아기가 감당할 수 있는 감정으로 바꾸어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담아내기의 본질이다.
상담실에서 내담자가 때로는 긴 침묵을 하는 시간이 있다. 이때 나는 섣불리 말을 하지 않고 기다린다. 때로는 이 침묵을 깨며 내담자의 서러운 통곡이 시작되기도 하고, 때로는 긴 침묵 이후 자신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내놓기도 한다. 숭고한 그 침묵의 시간을 통해 내담자는 소화되지 않은 채 꽉 막혀 있던 오래된 고통을 소화시키는 것이다. 나는 내담자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며 그의 고통을 담아준다. 그 시간은 내게도 버텨내기의 시간이 된다.
만약 당신이 지금 무너지지 않고 삶의 폭풍우와 어두운 터널을 견뎌내고 있다면, 그것은 과거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 기꺼이 지지대가 되어 버텨주었던(Holding)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느꼈던 안전함과 온기가 정신 속에 영구적인 구조로 내면화된 것이다.
자녀들이 사춘기가 되면 천사같이 착하고 해맑았던 내 아이 눈빛이 갑자기 흑화 한 듯 무서워진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방문을 닫고, 묻는 말에도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차려놓은 아침도 안 먹고 학교에 가고, 이제 부모는 안중에도 없다. 어느 날은 기분이 좋았다가 어느 날은 화가 나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부모의 모든 말은 권위를 잃어버린 듯하고, 그 자리를 친구가 대신한다.
아이들의 사춘기는 부모에게도 고역의 시간이다. 어떤 때는 과연 내 아이가 제 모습으로 돌아오기는 할까 싶은 생각이 침투하기도 하지만, 부글거리는 속을 다스리고 다스린다. 부모는 무차별한 아이의 공격을 인내하며 불안정한 아이를 버텨준다.
부모의 버텨줌을 통해 내면화된 온기는 아이 안에서 단단한 '자아 강도(Ego Strength)'로 자리 잡는다. 덕분에 성장한 아이는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과 '나'라는 존재를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심리적 힘을 가진 사람은 "상황은 가혹하지만, 내가 무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고통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 이 건강한 분리야말로 진정한 심리적 회복탄력성의 징표다.
하지만 나를 안아줄 대상이 없었거나, 현재의 현실이 내 마음의 그릇으로 버텨내기에 너무 압도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도널드 위니콧(Donald Winnicott)은 깊이 있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외부 현실과 내면세계 사이의 완충 지대를 '잠재적 공간(Potential Space)'이라고 정의했다.
이곳은 바로 '승화(sublimation)'가 일어나는 공간이다.
위니콧은 "아동이든 성인이든 오직 놀이를 통해서만 창조적일 수 있으며, 온전한 인격을 사용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어려운 상황을 성공적으로 버텨내는 이들은 종종 자신의 고통을 이 잠재적 공간으로 흘려보낸다. 깊은 삶의 통찰이 담긴 문장을 필사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아름다운 꽃을 가꾸는 행위는 현실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숨을 쉴 수 있는 '이행적 공간'을 만드는 숭고한 버텨내기다.
헤르만 헤세는 말년에 정원을 가꾸며 살았는데, 그곳에서 그는 긴 방황 속에서도 얻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얻었던 것 같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 일하고 생각에 잠기면서 파괴된 세계를 내 내면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며 당시 엘리트 교육의 산실이었던 기숙학교를 뛰쳐나온 그는 자유와 자아를 찾아가는 오랜 방황의 시간을 가졌다. 노년의 그는 정원에서 나무와 꽃을 가꾸며 고단한 영혼의 안식과 창작의 자원을 얻었다.
헤세의 잠재적 공간이 정원이었다면, 지금 내가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을 앞에 두고 글을 쓰는 이 낯선 카페 또한 나만의 잠재적 공간이다. 현실의 무거움을 잠시 잊고 활자 사이를 유영하며 나는 이 낯선 공간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지금 삶의 고통스러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문제 자체에 너무 깊이 함몰되지 않기를 당부하고 싶다. 외부의 혼돈이 당신의 내면 핵심까지 침범하게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대신 지친 자신에게 잠재적 공간 속에서 쉴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
시 한 구절, 잠시의 정적, 혹은 작은 창조적 행위라도 좋다. 내 친구는 민화를 그린다. 그녀는 민화를 그리며 분주한 일상에 쉼표를 찍는다. 그녀처럼 우리도 자신만의 완충 지대를 찾아야 한다. 바로 그 공간에서 고통을 견디는 힘인 심리적 근육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숨을 고를 수 있는 그 작은 잠재적 공간은 어디인가요?
오늘 하루, 억지로 참아내는 대신 잠시 멈춰 서서 당신만의 카푸치노 한 잔, 혹은 민화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묵묵한 버텨냄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