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가족이라는 이름의 '투사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달력을 바라보다 흠칫 놀랐다.
2월 17일. 빨간 숫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가슴에 한 손을 얹어 진정해 보려 하지만, 지난 명절의 불편함이 다시금 묵직하게 짓누른다.
‘하... 제발 명절 좀 사라졌으면... 도대체 누굴 위한 날인지….!’
답답한 심정에 냉수 한 잔을 들이켜며 지난 명절을 고통스럽게 복기해 본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겁다. 시어머니의 뼈 있는 말 한마디, 얄미운 말만 얹는 시누이들, 질투인 듯 경쟁인 듯한 동서의 불편한 눈빛까지. 그때 왜 나는 바보처럼 실없는 미소만 지었을까. 대체 당신들이 무엇이기에 나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하며, 종 부리듯 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저한테 함부로 하지 마세요!”
하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허리가 끊어져라 차려낸 밥상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먹고는, 아내의 불편한 기색을 애써 외면한 채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과일을 씹고 있는 남자, 바로 내 남편이었다.
그렇다. 명절의 식탁은 가족의 정이 오가는 곳이 아니다. 서로의 불안과 죄책감을 떠넘기는 치열한 ‘투사의 전쟁터’다. 이 갈등의 주인공들은 성별과 역할을 바꿔가며 어느 집에서나 반복되는 '명절의 전형'이다.
도대체 그들은 왜 이러는 걸까?
이제부터 그들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식탁 위를 떠도는 이 지독한 ‘투사(Projection)’의 실체를 하나씩 해부해 보자.
투사란, 감당하기 힘든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타인에게 떠넘겨버리는 방어기제다. 쉽게 말해 내 마음의 짐을 상대에게 던져버리는 '심리적 떠넘기기'인 셈이다.
첫째, 시어머니의 입장: “나의 ‘그림자(Shadow)’를 너에게 던진다.”
시어머니는 식탁 앞에서 일명 '라때'를 시전 하며 그림자 투사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녀의 눈에 비친 며느리의 삶은 너무나 편안하고 안락해 보인다. 자신이 젊은 며느리였을 땐 산더미처럼 전을 부치고, 제사상을 차려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손님상을 받아내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고작 식구들끼리 먹는 밥상 좀 차린다고 힘들어하는 며느리의 얼굴을 보니, 이해가 되지 않고 영 못마땅하다.
“너희들은 진짜 참 편한 세상에 사는구나.” “애는 왜 안 갖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낳아야지.”
툭툭 내뱉는 말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서글픈 심리가 숨어 있다.
시어머니도 과거엔 가부장제에 짓눌린 ‘억압된 며느리’였다. 그런데 내 눈앞의 며느리는 너무나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그 자유로움은 역설적으로 시어머니가 평생 참고 살아온 ‘희생의 세월’을 부정한다.
“네가 그렇게 편하게 살면, 죽어라 고생만 한 내 인생은 뭐가 되니?”
그녀는 자신의 내면 깊숙이 묻어둔 ‘자유롭고 싶었던 욕망(그림자)’을 며느리에게 투사한다. 며느리를 ‘이기적인 여자’, ‘철없는 요즘 애’로 깎아내려야만 비로소 자신의 비루했던 과거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정타는 아들이다.
내 귀한 아들이 며느리의 눈짓 한 번에 쩔쩔매며 눈치를 살핀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진다. 이 질투 섞인 분노 역시 고스란히 며느리 탓으로 돌려진다. 이것이 바로 시어머니가 명절에 유독 까칠해지는 진짜 이유다.
둘째, 시누이/동서의 입장: “나의 ‘불안’을 너에게 전가한다.”
“올케, 이것 좀 더 가져와.”, “자네는 우리 엄마 음식 솜씨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지.”
시누이의 내면에는 여전히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유아적 욕망’이 있다. 자신이 부모를 챙기지 못한다는 ‘불안’을 덮기 위해, 올케를 의도적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깎아내린다. 며느리가 낮아져야 자신이 ‘효녀’로 남기 때문이다.
형님과 동서 사이는 더 치열하다. 시어머니의 투사가 ‘폭격’이라면, 이들의 투사는 좀 더 ‘은밀한 게릴라전’이다. 형님이 설거지할 때 내가 과일 깎는 그 찰나의 눈치 싸움. 겉으로는 서로를 위하는 척 웃지만, 그 뒤에는 비교우위를 점하려는 권력 다툼이 숨어있다.
이 관계의 불안은 ‘시기심(Envy)’으로 변질되어 나타난다. 시댁은 칭찬보다 비난이 쉬운 곳이기에, 살아남으려면 ‘나보다 더 욕먹을 비교대상’이 필요하다. 남편의 연봉, 아이들의 성적, 가져온 선물의 가격표까지 비교하며 타인의 불행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슬픈 욕망.
하지만 기억하자.
형님과 동서는 적이 아니다. 가부장제라는 시스템 안에서, 누가 더 ‘사랑받는 며느리’가 될 것인가를 두고 다투는 슬픈 경쟁자일 뿐이다.
셋째, 남편의 입장: “나의 ‘죄책감’을 너에게 넘긴다.”
아내를 가장 화나게 만드는 건 시댁 식구들의 무례함보다, 그 순간 내 옆의 남자가 보여주는 ‘무력한 혹은 무심한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남편들은 결혼을 하면 이상하게 효자가 된다고 말한다. 특히 명절에는 시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 옛날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아들 모드로 자동 변환되는 걸 볼 수 있다. 아내가 주방에서 고군분투할 때 그는 소파에서 편안하게 식사하고 과일 먹으며 TV를 시청한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심리학적으로 남편은 지금 성인 남자가 아니다. 그는 엄마의 품을 그리워하는 아이로 퇴행(Regression)했다.
그의 무의식은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다. 늙어가는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부모님의 기대에 더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 이 무거운 감정을 스스로 감당하기 버거우니, 가장 만만한 대상인 아내에게 투사한다.
“당신이 좀 살갑게 해 봐.”, “분위기 좀 맞춰주라.”
이것은 부탁이 아니다.
‘나의 불효를 네가 대신 갚아줘(대리효도)’라는 버거운 요구다. 아내가 웃으며 시부모를 기쁘게 해 주면 자신의 죄책감이 씻겨나가 안도하지만, 아내가 찌푸리면 자신의 죄책감이 거울처럼 비치기에 견딜 수 없어 화를 낸다. 결국 명절의 남편은 아내의 보호자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이 편하자고 아내를 적진에 홀로 두고 도망친, (미안하지만) 회피자가 되고 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명절 전 증후군이나 명절 후 이혼 건수 증가와 같은 기사가 자주 눈에 띄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치열한 투사 전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나와 내 가정의 평화를 지킬 수 있을까?
상대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마음의 ‘방어막’을 세울 수는 있다.
첫째, ‘감정의 분리수거’를 실천하라.
명절 내내 날아오는 비난과 눈치는 사실 내 것이 아니다.
“아, 지금 어머님의 억울한 그림자가 말씀하시는구나.” “아, 남편의 죄책감이 또 발버둥 치는구나.”
그들의 감정을 내 마음 안으로 들이지 말고, 분리수거함에 던져버려라. 그것은 내가 짊어질 짐이 아니다.
둘째, 서로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라.
명절 기간만큼은 그를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은 아이’로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을 장착하자.
그가 아내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그럴 힘이 없는 ‘심리적 미숙아’이기 때문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분노보다 에너지를 덜 소모한다.
이것은 비단 남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친정에 간 아내들 역시 부모님 앞에서 갑자기 철부지 딸로 퇴행하며, 옆에 선 남편의 소외감을 외면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명절이라는 특수한 시공간 안에서 각자의 원가족 안에서 퇴행하는 셈이다.
셋째, 가장 강력한 무기, 거울반사의 미러링(Mirroring).
투사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그 투사를 받아주지 않는 것이다. 무례한 말에는 흥분하지 말고, 거울처럼 그 말을 그대로 비춰주어라.
“어머님, 제가 편해 보여서 속상하셨군요.” “여보,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커서 나한테 화가 났나 보네.”
내 감정을 섞지 않고 팩트만 돌려줄 때, 상대는 자신의 부끄러운 민낯을 마주하고 멈칫하게 된다.
부디 이번 명절엔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마음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서로를 탓하는 대신, 각자의 버거웠던 마음을 먼저 알아주길 바란다.
상대를 향한 '연민'과 나를 지키는 '현명함'만이 이 지독한 투사를 이겨내는 가장 센 방어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