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연 끊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저, 죄인인가요

제목: 죄책감 없이 나를 지키는 '심리적 거리 두기’

by 미담

명절을 며칠 앞둔 마트와 백화점은 설렘과 분주함이 뒤섞여 묘한 생동감이 넘칩니다. 누군가에게는 선물을 고르는 이 시간이 즐거움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슴을 짓누르는 부담과 미안함의 시간이기도 하겠지요.


양손 가득 선물 꾸러미를 들고 부모님 댁 현관을 들어서면 따뜻한 환대와 푸짐한 밥상이 우리를 맞이해요. 깨끗이 정돈된 이부자리에서 간만에 단잠을 자고, 아침이면 둘러앉아 뽀얀 떡국을 먹으며 덕담을 나누는 풍경.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명절'의 모습이에요.


하지만, 이 아름다운 풍경은 첫날, 첫 식사까지만 행복감을 줄지도 모릅니다.


서로 안부를 물으며 나누는 대화 속에 은근히 전해져오는 부모님의 불안으로, 다시 이전의 명절과 같은 모습이 반복되곤 하지요.


"너는 취직이 언제쯤 될 거 같니?",

"엄마 친구 아들은 이번에 대기업 들어갔다더라."

"계속 그렇게 넋 놓고 있으면 어쩌니? 앞으로 뭐 해 먹고살래?"


역시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 듭니다. '그렇지, 이래야 내 부모님이지... 한 끼만 먹고 일어났어야 했어'라는 후회가 밀려오죠. 그러면서도 희끗해진 부모님의 머리가, 늘어난 주름이 눈에 들어와 금세 죄송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안의 양가감정


많은 분들이 부모님에게 '양가감정(Ambivalence)'을 느끼지요. 말 그대로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미워하는,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공존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정받고 싶어서 다가가고 싶지만, 동시에 상처받기 싫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옛 노랫말이 뼈아프게 와닿는 순간입니다.


프로이트와 멜라니 클라인은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다"고 했어요. 우리가 가족에게 그토록 분노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여전히 그들에게 깊은 '사랑받고 싶은 욕구(의존 욕구)'가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해요. 기대가 없다면 분노도 없어요. 차가운 무관심만 남을 뿐이죠.


그러니 가족이 밉다고 해서 자책하지 마세요. 그 '애증'은 당신이 미성숙해서가 아니라, 그 대상이 당신에게 그만큼 '중요한 타인(Significant Other)'이라는 방증이니까요. 남이라면 안 보고 살면 그만이에요. 하지만 가족은 쓰레기통에 버리듯 끊어낼 수가 없다는 게 우리의 비극이죠. 세월이 흘러 부모도 늙고 나도 어른이 되었지만 관계의 패턴은 좀처럼 변하지 않아요.


"지난번엔 내 마음을 그렇게 설명했으니, 이번엔 좀 다르시겠지?"

혹시 이런 기대를 품고 고향에 가셨나요? 그리고 "역시나, 내가 미쳤지!" 하며 또다시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돌아오셨나요?

우리는 왜 이 상처의 굴레를 무한 반복하는 걸까요?


왜 우리는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다시 돌아갈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상처를 현재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재현(Re-enactment)'하려고 해요. 이번만큼은 내 힘으로 그 상처를 극복하고 통제해 보고 싶은 무의식적인 시도를 하는것이죠.


즉, 우리가 꾸역꾸역 부모님 댁을 찾는 건 단순히 효도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이번에는 엄마에게 인정받아서, 그 옛날의 상처를 치유받고 말 거야!"라는, 승산 없는 게임에 다시 도전하러 가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불나방처럼 상처 속으로 뛰어든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그건 어리석음이 아니라, 스스로를 치유하고 싶었던 당신의 눈물겨운 몸부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이 승산 없는 게임을 멈추고,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는 것(거리 두기)이 나를 지키는 진정한 승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요.


게다가 우리가 가족 때문에 이토록 힘든 건, 나와 가족 사이의 '심리적 탯줄(정서적 융합)'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해요. 이 경계 없는 '융합(Enmeshment)' 상태에서는 필연적으로 '투사(Projection)'가 일어납니다. 부모님은 자신의 해결되지 않은 불안을 자식에게 던져버리고, 우리는 그 투사된 감정을 내 것인 양 덥석 받아먹고 체해버리죠.


부디 기억해 주세요. "이제 그만 연을 끊고 싶다"는 비명은 당신이 패륜아라서가 아닙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당신의 자아가 "나도 이제 숨 좀 쉬고 살자(심리적 독립)"라고 외치는 절박한 생존 신호라는 사실을요.


나를 지키는 심리적 베이스캠프, '잠재 공간'


그렇다면 이 거리 두기는 언제까지 해야 할까요?


기간은 달력의 날짜가 아니라, 여러분의 '심리적 근육'에 달려 있어요. 부모님의 비난이나 하소연을 듣고도 내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지 않을 때, 그들의 감정을 내 것으로 흡수하지 않고 "저건 어머니의 불안이구나" 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길 때까지. 딱 그때까지만 '일시적 멈춤'을 하셔도 충분해요.

그 멈춤의 시간 동안, 우리는 도망쳐 숨어있는 게 아니라 '잠재 공간(Potential Space)'으로 들어가야 해요. 영국의 정신분석가 위니코트가 말한 이 공간은, 외부의 현실과 내면의 환상이 침범하지 못하는 제3의 영역입니다. 이곳은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심리적 베이스캠프예요. 부모라는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고갈된 내 영혼에 창조적인 숨을 불어넣는 것이죠.


누구의 자식도 아닌 오직 '나'로서 좋아하는 음악에 몰입하거나, 서두를 것 없는 느긋한 산책, 혹은 하얀 종이 위에 내 안의 응어리를 끄적여 보는 사소한 창조의 시간들이 모두 훌륭한 잠재 공간이 됩니다.

이렇게 내 안에 에너지가 가득 차올라야 비로소 부모님을 '나를 괴롭히는 거인'이 아닌, '그저 나이 들고 연약한 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바꿀 수는 없지만, 부모님을 대하는 내 태도와 마음의 그릇은 키울 수 있어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심리적 독립의 시작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다시 건강하게 만나기 위한 전략적 후퇴


단절은 결코 끝이 아니라, 언젠가 이루어질 건강한 만남을 위한 준비 과정이어야 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고립된 단절을 선택한다면, 마음속 해결되지 않은 상처는 또 다른 병리적인 관계를 찾아 반복될지도 모르니까요.


지금의 거리 두기는 더 큰 사랑을 위해, 혹은 나 자신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족 문제로 힘들어하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비는 기도>를 띄웁니다.


주여,

우리에게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를 주시고,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부모라는 바꿀 수 없는 대상은 내려놓고(평온), 나를 지키는 거리 두기를 선택할 수 있는(용기)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문의 삽화는 박기현 작가님(@pkh262)의 소중한 작품을 협조받아 수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