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정말 미운데, 그리워

제목: 지독한 사랑의 다른 이름, 양가감정

by 미담

서늘할 정도로 새하얀 침대 시트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누가 다녀갔는지 알 수 없는 상쾌한 냄새가 방의 쾌적함을 더했다. 적당하게 큰 방이었다. 혼자 있기에 약간 넓은 듯했지만 지친 몸과 마음을 누이기에 충분히 안락했다.


캐리어를 세워둔 채 하얀 시트에 몸을 던졌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남편을 두고 혼자 와 있는 호텔방의 고요함이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편안한 나른함이 몰려왔다.


사랑할수록 멀어지는 남자, 이해할 수 없는 거리감


잠깐 눈을 붙이고 깨니 창밖엔 어느새 어둠이 내려 있었다. 맑아진 머리로 그녀는 그의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답답해진 것일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기억을 따라가자, 그와 결혼생활 초반부터 맞닥뜨렸던 당황스러운 일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그는 회피형 애착(Avoidant Attachment)을 가진 이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특유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신혼의 단꿈에 젖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는 그걸 사랑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너무 들러붙는다’며 부담스러워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닐 터였다.


다만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그 감정의 홍수에 압도당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리라. 그때의 그녀도 그런 남자를 이해할 지식이 없었기에 다가갈수록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남편의 행동양상을 정확히 보지 못했다.


그녀의 넘치는 사랑과 강박적인 그의 성실함으로 그럭저럭 그들의 결혼생활은 흘러갔다. 가끔씩 정서적 단절감을 느꼈지만 아이들 양육하며 에너지를 쏟아부었기에 그것은 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시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했던 시어머니는 아들인 그녀의 남편을 정서적으로 남편 삼아 살아왔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아들이 사랑하는 며느리에게 대놓고 “아들 뺏겼다.”라고 말하며 상실감을 표현했다.


성인이 되어 자신과 거리두기 하는 아들에게 전화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전화해서 꼬치꼬치 아들부부의 일상에 자리 잡고 싶어 했다. 결혼생활이 지속되는 동안,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서 시어머니의 요구에 순응하는 상냥하고 착한 며느리였다.


그렇게 살다 보니 시어머니에게 그녀의 친절은 권리가 되었다. 요구는 점점 무거워졌고, 시어머니는 안부전화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냉랭한 목소리로 그녀를 꾸짖었다.

며느리가 아이들 때문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에도 엄살로 치부하며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남편 역시 아내의 어려움에 깊이 공감할 능력이 부족했다. 어머니의 숨 막히는 밀착과 통제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는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오직 차가운 이성으로만 감정을 처리하는 '주지화(Intellectualization)'라는 견고한 방어기제를 발달시킨 사람이 되었다.


그런 정서 소통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20년 넘게 쌓여왔던 지독한 외로움은, 시어머니의 전화 한 통과 그 앞에서 무력한 아이처럼 서 있는 남편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마침내 임계점에 도달했다.


호텔방이 주는 아늑함과 절대 고요가 시끄러운 그녀의 머릿속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과 영원히 불통의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는 비참함이 통곡으로 터져나왔다.


쓰디쓴 눈물을 흘린 후 침대에 누웠던 그 밤, 가슴 저 먼 구석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그리움이 일렁였다.


남편이 미워 죽겠는데 그리움이라니, 당혹스러웠다.


미움보다 지독한 그리움, '양가감정'이라는 이름표


Image ⓒ 박기현 (Threads @pkh262)

사람들은 흔히 사랑과 미움이 반대말인 줄 알지만, 사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도 지독하게 그리워한다는 건, 그만큼 내 안에 그 사람을 수용할 거대한 사랑의 자리가 남아있다는 것이리라.


이 모순된 감정은 결코 마음의 병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상대를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뼈아픈 증거였다.


정신분석에서는 이처럼 미움과 그리움이 혼재하는 상태를 ‘양가감정(Ambivalence)’이라고 부른다.


이 깊은 고통은 내가 사랑했던 다정한 모습과 나에게 상처를 주는 차가운 모습이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버거울 때 발생한다.


하지만 성숙한 어른의 시선은 이 혼란을 넘어선다.


내게 실망을 주는 그의 결핍조차 그 사람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좋음'과 '나쁨'이 뒤섞인 불완전한 한 인간으로 상대를 온전히 수용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양가감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진정한 통합이자 성숙이다.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이상화가 클수록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당혹감과 좌절을 경험한다.


부모란 마땅히 자식을 잘 양육해야 하며, 독립된 개체로 인정을 해야 한다는 부모에 대한 '이상화’가 강할수록 현실의 부모 모습이 그렇지 못할 때 겪는 고통은 훨씬 더 크다.


마찬가지로 그녀도 남편을 '완벽한 대상'으로 이상화했었기에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절망과 분노가 그토록 격렬했던 것이다.


또한 양가감정은 보통 죄책감을 동반한다.

특히 가족과 같은 중요한 타인에게 양가감정을 느낄 때 죄책감의 무게는 더 묵직하다.


부모를 존경해야 한다는 당위가 강한 한국적 가족주의 문화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양가감정을 느낄 때 갖게 되는 죄책감이 얼마나 무거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억압적인 구조 속에서, 그녀의 내면 역시 '가정을 지키려면 이해심 많은 아내이자 며느리여야 한다'는 무거운 초자아(Super ego)와, '이 모든 숨 막히는 굴레를 던져버리고 도망치고 싶다'는 날것의 이드(Id)가 매일 밤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고 있었다.


그 치열한 전투 속에서 그녀가 느낀 무거운 마음도 바로 그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이런다고 80 넘은 노인이 바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남편이 바뀔 것도 아닌데 내가 그냥 이전처럼 참고 살면 되는 게 아니었을까.’


이처럼 그녀가 남편에게 양가감정을 느낄 때 동반되는 죄책감의 밑바닥에는 역설적이게도 ‘유아적 전능감’이 숨어 있다.


내가 인내하지 않고 분노를 터뜨리면 이 가정이 산산조각 날 것이라는 두려움과, 반대로 내가 착한 며느리와 아내로 계속 참아낸다면 언젠가 저들을 변화시키고 이 가정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통제감 말이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남편에게 단순한 안도감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의 진심이 그의 심장에 부딪쳐, 그가 스스로 주지화의 껍질을 깨고 나오길 갈구했다.


하지만 이 서늘한 호텔방에서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부서진 뼈를 맞추는 '재건'은 의사가 할 수 있어도, 다시 걷기 위한 '회복'은 환자 본인의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진실을.


환상의 장례식을 치르고, 현실의 남편을 마주하는 일


현실은 그녀가 참는다 해서 시어머니나 남편이 원하는 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아적 전능감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국 내가 타인을 구원하거나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는 철저한 무력함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녀가 호텔방에서 서러운 통곡을 쏟아낸 것은 그런 무력한 자신을 인정함과 동시에 이상화된 남편을 떠나보내는 뼈아픈 애도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완벽하게 소통하고 공감해 주는 남편’이라는 '환상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결핍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애도는 떠들썩한 장례식이 끝난 뒤, 텅 빈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집으로 돌아가면, 주지화의 견고한 갑옷을 입은 무력한 남편이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변함없는 풍경을 다시 마주하는 일은 숨이 턱 막힐 듯 고통스럽겠지만, 적어도 이제 그녀는 허공의 환상과 싸우느라 자신을 갉아먹지는 않을 것이다.


남편이 밉고도 그리운 이 아픈 양가감정도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지고, 상처 입은 두 어른이 각자의 결핍을 안은 채 불완전한 현실을 함께 살아나갈 것이다.


그것이 환상을 떠나보낸 자가 마땅히 치러야 할, 진정한 통합을 향한 어른의 애도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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