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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로크무슈 Mar 24. 2022

이직자의 여행

(8) 이직자의 여행


이번 여행에 대해 글을 쓰면서도 웃긴 점은, 사실 나는 여행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네다섯 군데의 회사와 면접과 연봉협상, 다니던 회사의 퇴직까지 한 번에 처리하다 보니, 한 달여간 정신이 가출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도저히 새로운 무언가를 할 여유가 없었다. (그 와중에 나도 닥치면 멀티플레이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지금 밖에 시간이 없다며 여행을 종용(?)해준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사실 이 친구가 아니었으면 이번 여행은 절대 불가능했다. 이 친구는 휴식기 없이 이직을 한, 아니 그것도 금요일 퇴직, 월요일 새 직장 출근이라는 구전신화 같은 경이로운 이직 일정을 ‘진짜로’ 실현한 대한민국 산업의 역군이었다. 때문에 여행 종용은 그녀 자신의 휴식에 대한 갈망과 한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이제와 생각해 본다. (사실 좋은 곳으로 갔다. 그녀는 국가사업을 주도하는 연구원이다.)


같이 커피를 마시다가 떠밀려 여행지를 정하고, 이틀 뒤 비행 편을 예약하고, 대충 호텔을 예약했다. 아니 예약해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이 친구가 아니었으면 이번 여행은 없었다고 하는 게 맞다. 여행지를 고르는 내내 부러움에 젖은 그녀의 촉촉한 눈빛을 보며 잠깐씩 미안해지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덕분에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이 자릴 빌려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한다.



종종 이 친구의 도움을 받을 때가 있다. 보통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의견을 물어보는 몇 안 되는 친구인데, 이 친구의 답변은 항상 명료하다. 고민하고 있는 내가 바보가 될 정도로 쉽게 정리를 해준다.


이직 전 미국에 있는 회사에서 먼저 포지션 제안이 온 적이 있다. 면접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포지션에 적합하다며 꼭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해놓고는 1년 가까이 연락이 없었다. 몇 번 먼저 연락을 했을 때도 아직은 어려우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만 되풀이 했었다. 기다리기도 지쳤거니와 괘씸하기도 해서, 어느 날을 따로 정해 그 미국 회사에 연락해 지금 뭐하는 짓이냐며 면박을 줄 심산이었다.


그럼에도 그 친구가 말하길, “굳이 싫은 말을 하면서까지 선 그어버릴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잊고 있다가 정말로 함께 일 하자며 연락 오면 그땐 나름 또 좋은 거 아니야? 그냥 가능성을 열어둬.”라고 했었다. 너무 맞는 말이라 속으로 감탄했지만, 겉으로는 화가 안 가시는 척을 했다. 내가 외면하면 그만인 것을. 그러다 진짜로 같이 일하게 되면 그거 나름 또 좋은 일 아니냐며.


내 태산 같은 고민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것일 때가 있다. 3자의 생각이 해답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가끔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을 때면 주변 사람에게 슬쩍 운을 떼어보라.



두 달 뒤, 놀랍게도 정말로 미국에서 제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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