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로크무슈 Mar 25. 2022

파리 - 샤를 드골 엑소더스

(12) 파리 - 샤를 드골 엑소더스


90도 의자라고 들어봤는지,


의자가 뒤로 젖혀지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일부 저가 항공사가 있다. 좌석 간격도 역시 좁아서 바짝 당겨 앉으면 요추와 등받이가 아름답게 평행을 이룬다. 그 순간은 마치 레고 의자에 앉은 레고 인간이 된다. 이런 의자는 보통 앉자마자 감이 온다. 이야 오늘은 내가 레고가 되겠구나.


의자 자체에 인체공학적 설계 따위는 당연히 없다. 비용절감의 의지가 한번 더 드러나는 곳은 쿠션이다. 쿠션이 또 그렇게 딱딱하다. 쿠션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데, 마땅한 단어가 없다. 미안.


이번 파리행 에티하드 항공사의 좌석으로 당첨되었다. 엉덩이가 울다 지쳐 내가 대신 울어주다를 반복하니 도착했다.


에티하드 저가 편을 탑승한다면 꼭 방석을 챙기시길.


레고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막상 여행을 출발하는 시점에서 후회가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나는 일종의 여행 루틴 같은 감상인데, "그냥 방 안에서 누워 쉴걸... 굳이 기어 나와가지고..."가 되겠다. 이 감상은 결국 사진으로만 보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질 때야 "잘 왔네." 하며 해소된다. 


이번 여행에서는 사실 각종 증명서와 검사서, 동의서, 서약서 등등의 서류뭉치를 준비하면서 이미 한 차례 질려버린 탓도 있지만, 레고 좌석에 깔려 울고 있는 엉덩이와, 옆 자리에 아주 시끄러운 터키 관광객 무리, 이륙부터 착륙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가 컴퍼티션으로 체리온탑을 다투는 덕분에 후회에 절여졌다.


내가 과연 이 기분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으로 드디어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코로나 검사장의 내외부 전경



여행지 도착과 함께 기분이 고조되어야 함이 정상이다. 다만 몇 번이고 이미지 트레이닝했던 미션이 있었는데, 사전예약까지 해둔 공항 내 PCR 검사다. 이 검사 결과가 있어야 EU 국가 내에서 사용 가능한 보건 패스가 발급되어 자유롭게 관광할 수 있고, 이튿날 아이슬란드까지 무사히 출국할 수 있다.


심호흡을 하며 나아간다. 입국심사를 하지 않는다? 쓰읍, 이렇게 서류를 잔뜩 준비했는데.

아쉬워하며 그대로 나아간다. 물어가며 코로나 검사장까지 도착했다. 줄이 아주 길다. 문진표를 작성하고, 결제를 하고, 또 한참을 기다린다. 새치기의 위기를 눈썹 올리기와 어깨 으쓱하기로 몇 번 방어하니 그제야 내 차례가 된다.


검사를 받으러 들어가니 기입해준 서류에 예약번호와 이름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했다.(직원이 휘갈겨 써준 거라 불어인 줄 알았다. 정말로.)

다시 처음으로. 그래도 발견한 게 어디냐며.


문진표를 새로 작성한다. 한참을 기다린다. 새치기를 방어한다. 드디어 검사를 받는다. 


검사 결과는 3시간 뒤에 나온다고 한다. 애매한 시간.


결국 공항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샌드위치를 하나 사서 바닥에 앉아 먹는다. 왜인지 모르게 혼자 있는 아이와 한참 대화도 했다. 그 아이는 불어로 나는 한국어로. 

지나가는 군인과 경비원들은 자꾸 내 여권을 보여달라고 한다.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만, 이제 그만 이 청사에서 나가고 싶어요.


시내로 가는 공항버스에서, 다들 설레는 중일까.


결과는 자비 없이 딱 3시간이 지나서 나왔다. 다시 줄을 서서 결과지 출력을 한다. 보건 패스를 받으러 다른 구역으로 또 한참을 걸어간다. 역시 또 줄을 선다. 이미 밖은 어둑어둑하다. 


보건 패스를 발급받았다. 이제 나가면 된다! 여섯 시간여를 표류한 공항을 나섰다!


모노레일을 타고, 또 한참을 걸어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공기가 이렇게 상쾌할 줄이야. 공항버스를 타러 나오니, 버스 티켓 발권기가 고장이 나있다. 


버스 운전사는 말한다. 발권기는 내가 있던 그 공항청사에 있다며, 거기로 다시 가서 사 오라고.


결국 다시 모노레일에 몸을 싣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목적지에 대한 단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