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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로크무슈 Mar 27. 2022

파리 - 양파수프

(15) 파리 - 양파수프


대학생일 때, 월세 15만 원인 원룸에 잠깐 살았었다.


당시는 아르바이트로 겨우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었던 터라 6시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일하러 달려갔었다. 직장인들이게 통기타를 가르치는 일을 했었는데, 밤 11시가 넘어야 끝나니 굳이 비싼 집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단지 몸만 뉘일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 


15만 원의 방 컨디션은 예상하는 대로다. 벽지 무늬는 곰팡이 아트, 룸메이트는 신대륙 출신의 대왕 바퀴벌레.


집으로 오는 길이 또 그렇게 험난해서, 몇 곳의 어둑히 방치된 공사장을 지나 입구까지 즐비한 유리파편을 대충 피해서 현관문을 닫고 나면 그제야 한숨을 돌렸었다.


날짜가 바뀔 때 쯤이면 녹초가 된 몸을 겨우 움직여 꼭 짜장 컵라면을 끓여(아니 물을 부어) 먹었다. 컵라면을 그닥 좋아하진 않는데, 누나가 ‘간식’ 삼으라며(분명 끼니가 아니고 간식이랬다.) 두 박스를 배송해준 덕분이다. 누나도 내가 한 달 동안 이것만 먹을 줄 몰랐겠지. 식비를 아끼자는 게 결국 위경련으로 응급실에서 식비만큼 돈이 깨지긴 했지만. 아직 누나는 모른다. 알면 지금이라도 엄마한테 이를 것 같아.


편성이 왜 그랬나 모르겠지만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돌아온 늦은 밤엔 꼭 ‘원나잇 푸드트립’을 재방송해줬었다. 신발장에 껴들어온 유리파편을 대충 모아 흘려보낸 후, 전 집주인이 버리고 간 작고 두꺼운 LCD 텔레비전을 켜 놓고, 대충 몸을 씻은 후 짜장 컵라면을 익히기 시작하면 방송이 시작한다. 이런 것도 루틴이 되는구나 싶으면서도, 나름 하루의 낙이 된다. 


유럽 편이 인기가 많았던 탓인지 그렇게 자주 나왔었다. 그중 파리 편에서는 출연자가 아침에 양파수프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뜨끈해 보이는 게 또 얼마나 맛있어 보이던지. 짜장 컵라면을 억지로 쑤셔 넣으면서도 그 양파수프가 그렇게 먹고 싶었다.


나무 사이로 안개 낀 에펠탑이 보인다


안개 낀 에펠탑이 제법 운치 있다. 예상하지 못한 풍경(광경)에는 묘한 기분이 든다. 미디어로 접해보지 못한 모습이니까. 내가 직접 여길 왔으니 볼 수 있는 장면일 테니까. 미처 꼭대기가 올려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낀 에펠탑의 모습은 나에게 그랬다.


지금 내가 와있다. 그 양파수프 가게다.


카메라를 기꺼이 꺼냈겠지만 조금 이 기분에 머물고 싶기도 했고, 주머니에서 양손을 다 꺼내고 싶지 않아, 낡은 휴대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었다. 


천막 밖으로 살짝 얼굴만 내밀어도 에펠탑이 보이는 양파수프 가게



양파수프에는 짜장 컵라면 맛이 날 것만 같았는데, 생각보다 달짝지근했다. 수프에 푹 절여져 눅눅해진 바게트 빵이 아주 새롭다. 한 입 크게 입에 떠 넣는다. 따뜻한 빵의 쿠션감이 혓바닥 전체를 부드럽게 감싼다. 애써 옛 생각을 떠올려본다.


양파수프와 에스프레소, 분명 레귤러 커피를 주문했었는데.



이 양파수프에 관한 기억의 중심은 절박함에 있었다.

아니 오히려 짜장 컵라면의 기억이라고 해야겠지.


기억 속 나는 여전히 유리조각을 치우며 겨우 바닥에 앉아,

짜장 컵라면을 들이켜며 양파수프의 맛을 애써 상상하고 있다.


상상하는 맛은 아니다 야, 좀 짜다.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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