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로크무슈 Mar 27. 2022

파리 - 혼자 하는 여행에 관하여

(16) 파리 - 혼자 하는 여행에 관하여


굵직한 여행은 대부분 혼자였다.


혼자 하는 여행을 싫어하진 않는다. 적당히 정리할 시점이 되었을 때 떠나는 여행은 혼자다. 사실 정리할 시점이란 게 거창한 의미는 아니다. 

일신상의 크고 작은 변화, 혹은 수렁에 빠진 기분을 건져 올려야 할 시기 정도.


그래서 보통 혼자 떠났던 시기를 복기해보면 회사에서 토사구팽 당했을 때, 부서를 옮김 당했을 때, 만나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 정도다.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항상 떠나진 않는다.

사실 출근이다 뭐다, 떠나지 못하는 상황일 때가 더 많으니까. 이럴 때는 집 안에 종일 널브러져 있게 된다. 친구가 없는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이런 날은 아무것도 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저녁 즈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 자신을 한심해하며 잠든다. 뭔가를 할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 자신을 견디지 못한다. 의외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증상을 갖고 있다. 뭔가를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만 같고,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아 뭐라도 하려는 증상. 나는 꽤나 중증이다.





이럴 때 떠나는 여행은 꽤나 정적이고, 느긋하게 비워내는 여행일 거라 생각하는데, 아주 큰 오산이다.


생각에 발목을 붙잡히면 안 된다. 이런 날은 빈틈없이 계획을 세운다. 하나의 일정이 끝나면 다음 목적을 달성하러 움직인다. 음식점에 메뉴까지 미리 정해 놓는다. 동선이 꼬이더라도 꼭 그곳으로 간다. 게임의 퀘스트를 달성하는 것처럼 하나씩 일정을 쳐낸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따뜻한 물에 씻는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사 온 간식에 맥주 한 캔을 깐다. 하루를 꽉 채워 보냈다는 성취감에 만족스럽다. 다른 생각이 차마 들어올 새가 없다.


이직을 하며 -적당히 쉼표를 찍자며- 떠난 여행은 좀 늘어져도 된다 생각했다. 여행지에 내던져져도 될 거라 생각했다. 급하게 떠나 계획이 없는 탓도 있으니 잘됐다 싶었다.


그러나, 파리는 그러지 못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리 - 양파수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