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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직요괴 Oct 25. 2021

안 맞는 옷을 입을 바엔 나체로 살겠습니다

노출증은 아니고요

제목과 관련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한다.


회사의 지원으로 갤럽(GALLUP)에서 진행하는 '강점 진단 검사'라는 걸 해볼 기회가 있었다. 가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을 때가 있다. 그래서 이렇게 '나'라는 사람을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시각에서 분석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분석 결과를 보다 보면 평소에는 어렴풋하게 느껴졌던 내 모습이 선명하고 또렷해지는 것 같다. (그렇게 MBTI 과몰입러가 되었다)


그래 맞아. 나라는 사람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구나.


갤럽 강점 진단은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유형의 새로운 검사였다. 과정은 비슷했지만, 결과를 보여주는 방식이 달랐다. 말 그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강점', 쉽게 말해 내 장점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알려준다. 부족한 점을 채우려고 하기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찾고 키우라는 취지라고 한다.


갤럽에서는 우리가 가진 여러 가지 강점을 34개 테마로 분류하고 그중 가장 많이 해당하는 테마부터 순서대로 알려준다. 34개 테마의 순위를 모두 알려주는 보고서도 있긴 한데, 비싸다.


회사에서는 상위 5개 강점만 심층 분석해주는 보고서로 지원을 해줬다. (갤럽에서는 보통 상위 5개 강점, 조금 넓게는 상위 10개 강점만 극대화시켜도 훨씬 나은 삶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20여 분간 이어지는 질문들에 답을 하니 금세 보고서가 완성되어있었다. 결과지를 처음 읽었을 때는 보고서에 나와있는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나를 오랫동안 지켜본 누군가가 쓴 글인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누구냐 넌?


딱 말해


대체 이런 검사는 누가 만드는 건지 정말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인 게 분명하다.(참고: 도널드 O. 클리프턴앞으로 자기소개할 일이 생기면 쓸데없이 이름 나이 공개하지 않고 그냥 검사 결과지를 보여줘야겠다.


하지만 이 글에서 결과에 나온 강점을 읊을 생각은 없다. 이건 갤럽 좋으라고 쓰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동치는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혼란이 생길 때가 많았다.


나는 누구인가, 왜 이렇게 사는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감정은 솟구치는데 그걸 정리할 마음의 여유가 최근에 많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강점 보고서를 열어봤다. 내용들을 찬찬히 다시 읽다 보니 유독 반복되며 눈에 띄는 글자들이 몇몇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함

신뢰

관습에 대한 거부

열린 마음


역시나 여기서도 반골 기질은 빠지질 않네. 그나저나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면서 관습에 대한 거부도 있다니 이게 무슨 '열림교회 닫힘'같은 소리란 말인가. 의아하겠지만 심층 설명을 보면 이해가 간다. 위의 네 단어로 내 성격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겠다.


자신과 타인에게 솔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선호하며, 신뢰를 중요시 여긴다. 좋지 않은 관습에는 저항하고 이의를 제기하지만, 자신 혹은 타인의 재능과 약점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 물론 좋은 말만 쓴 거다. 이건 '강점'검사니까. 안 좋은 점은 검사 안 해봐도 안다. 우선 성격 파탄난 것부터... 아무튼 검사 결과지를 보니 답답하던 마음이 살짝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뭔가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나는 솔직함을 무기로 하는 사람이다. 숨기거나 꾸미지 않는 태도로 타인의 마음을 얻는다. 그리고 상대방 역시 본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때 상호 간의 신뢰를 갖는다. 솔직함 그 자체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런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힌다면 난 불편함을 참기보다 특유의 반골 기질로 그 옷을 벗어버린다. 하여간 고집 진짜.


좋은 얘기들만 나오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갑자기 격해지는 것 같긴 한데, 나의 일부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문장은 없긴 하다. 이런 성격을 객기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결국 본인 손해라며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뭐 어쩌겠나. 그게 자랑스러운 내 강점이라는데!




자, 이제 다시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사실 난 서른이 넘어서도 나만의 옷 스타일을 찾지 못했다. 어른이 되면 다 멋지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실은 참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는 걸 결국 다 커서야 깨달았다.


어떤 옷 스타일이 잘 어울리는지는 많이 입어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길래 우선 이것저것 입고 싶은 대로 도전해봤다. 남이 입은 걸 봤을 땐 참 예쁘고 맘에 들었는데 막상 입으니 썩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길이나 품이 맞지 않을 때도 있었고, 움직이기에 영 불편한 옷도 있었다. 겨우 이 옷을 사려고 황금 같은 내 시간과 돈을 들였다니! 아까울 때도 많았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니 어느새 손이 자주 가는 옷 몇 벌이 생겼다. 그 옷을 입은 날이면 신기하게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유독 얼굴 좋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덕분에 지나가다 비슷한 스타일의 옷만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사게 된다. 그렇게 옷장에는 점점 나만의 스타일이 녹아든 옷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게 잘 맞고, 편하고, 어울리는 옷이 뭔지.


앞으로 나이가 들면 지금의 스타일과는 또 달라질 것이다. 그땐 다시 옷을 입고 벗으며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이제 그 과정마저 즐길 준비를 하려 한다.


안 맞으면, 벗으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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