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직요괴 Nov 08. 2021

스타트업에서는 꿈을 펼칠 수 있을 줄 알았지

그렇게 꿈이 와장창

퇴사 후 이번 일주일은 글도 잠시 내려놓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눈 뜨는 게 두렵지 않은 평온한 일요일을 보낸 게 참 오랜만이다. (요일) 개념 없이 사는 삶이 이렇게 행복했구나 새삼스레 느꼈다. 사람들도 만나고, 아주 짧게 여행도 다녀왔다. 돼지런한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다음 끼니 메뉴를 정하는 게 인생 최대 고민이 되는 이 순간이 진심으로 행복하다.


이런 말만 들으면 타고나길 온 몸에 백수 한량의 피가 흐르는 것 같지만, 사실 나는 숨길 수 없는 워커홀릭 인간이기도 하다. 물론 무의미한 일 말고 내 기준으로 의미 있다고 판단한 일에 열정을 쏟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스타트업에서의 직장생활을 선택했다.


중소기업, 비영리 조직, 국내 대기업, 외국계 기업까지 거치며 소위 말해 핏(fit)이 맞는 일을 찾아 헤매던 중, 아주 우연한 기회에 스타트업을 접하게 됐다. 주변에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거나 창업한 친구들이 더러 있었기에 귀동냥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실제 경험은 처음이었다.


첫인상? 재밌을 것 같았다. 모순적이게도 당시의 나는 지금처럼 조직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돈이고 커리어고 뭐고 직장생활이 너무 지긋지긋해 견딜 수가 없어 내 일을 해보고자 마음먹은 시기였다. 그때 지인의 소개로 첫 스타트업 회사를 만났고, 공교롭게도 마침 하려던 것과 비슷한 일을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지향하는 가치관이 평소 생각하던 맥락과 굉장히 상통했다. 사는 데 의미를 찾지 말라고 하던데 난 참 이상하게도 의미를 찾아야만 동력이 생긴다. 의미 있는 일, 마음을 휘둘린 건 그게 결정적이었다. 


도와줘요 인터스텔라...!




솔직히 처음 몇 달은 나쁘지 않았다.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조직문화가 잘 맞았고 해야 할 일을 찾아 나만의 방식대로 꾸려가는 게 즐거웠다. 모든 일의 A~Z까지 만들어나가야 하는 게 고단하긴 했지만,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 무척이나 뿌듯했다.


R&R(역할과 책임)이 명확하지 않아도, 출장과 미팅이 잦아도, 그 탓에 업무시간이 무척이나 들쑥날쑥해도 견딜 수 있었다. 비록 내가 하는 일은 사소했지만, 소시민으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창대한 꿈에 한 걸음 다가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또렷하진 않지만 분명 보였던 길이 조금씩 흐려지는 것 같았다. 처음 회사를 만났을 때 내게 제시했던 조직의 비전과 방향은 어느새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중간에 길이 어긋났나 싶었으나 사실은 애초부터 다른 길을 걷고 있었음을 곧 깨달았다. 속았구나.


그럴 줄 알았어~ 역시 기대를 말아야지.


마음속에 숨어있던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자아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최대한 시니컬한 태도를 유지하며 무너지는 스스로를 방어하려 했지만 좌절과 실망은 감출 수 없었다. 너무하다.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의문이 들면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병이 있다. 대체 왜 그럴까? 아무리 사업이 현실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코 앞만 보고 돈을 벌려고 했던 거라면 굳이 왜 이런 어려운 일을 택한 걸까? 허울뿐인 가치관인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차서 남들에게 떠벌릴 수 있는 걸까? 어떤 모습이 진실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인류애가 남아날 길이 없다.


결국 스타트업에서의 생활은 호의와 권리의 상관관계를 표현하는 희대의 명언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안다'가 정말 범용적인 문구라는 걸 또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물론 훌륭한 스타트업도 있다는 걸 안다. 내가 만날 확률이 극히 낮을 뿐이지.


직접 다닌 곳들 외에도 주변의 사례들을 보면 오히려 스타트업에서 기업윤리와 도덕적 해이에 둔감한 경우가 많았다. ESG 경영이 유행처럼 번지는 요즘, 시장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척해 선보이는 스타트업들은 더욱이 본인들의 사업이 사회에 끼칠 영향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창업할 생각도 없는 내가 이걸 왜 내가 고민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건 직원조차 실망시키는 조직에서 사회를 만족시킬만한 서비스가 나올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점이다.


오늘도 스타트업 동지들과 대화를 하며 이런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게 조금 울적해져 글을 써본다.


"1=1"


어디선가 본 직장인에게 유용한 수식이다. 

일에서 꿈을 찾지 말자. 일은 일이다.


공감하면서도 씁쓸한 이 기분. 

일은 정말 일이어야만 하나.




매거진의 이전글 출근한 직장인에게 자아는 있어야 할까 없어야 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