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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직요괴 Nov 17. 2021

'열심히'라는 말의 족쇄

열심히 사는 게 미덕이 아녔으면 좋겠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신입사원의 포부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말이다.


학생의 본분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취업을 위해 열심히 도전하고,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돌이켜 보면 지난 내 삶은 온통 '열심히'와 함께했던 것 같다.


물론 극단적으로 반대에 치달아 엄청나게 무기력한 인생을 살던 시기도 있었다. 길진 않았지만.

어떠한 때에 그렇게 무기력했었냐고 묻는다면, '열심히'가 성과를 내지 못했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관성에 젖은 삶은 참 무섭다. 어떤 생각도 하기 싫은 상황에서조차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과 조급함을 느끼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혔다.


유독 자주 꾸던 꿈이 있다. 먹을 걸 환장하게 좋아하는 나답게 꿈속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뷔페에 가게 됐다. 온갖 산해진미가 늘어져있는 공간에서 눈이 돌아간 채로 접시를 들고 좋아하는 음식들을 가득히 집어 담는데, 그 순간 뷔페는 마감 시간을 알린다. 아직 한 입도 먹지 못했는데, 먹고 싶은 음식이 저렇게나 많은데!


마음이 급해져 부랴부랴 담아둔 음식이라도 먹으려는 찰나, 내 접시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정신없이 접시를 찾는 동안 깔려있던 수많은 음식들은 어느새 빠르게 치워져 있다. 결국 맛도 못 본 음식들은 내 손을 떠났고 그렇게 꿈은 끝난다.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난다. 잠에서 깼더니 얼굴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있을 만큼 서럽고 화가 났다. 뷔페에 가는 꿈이 자각몽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제대로 즐길 자신 있는데 말이다.


센과 치히로를 볼 때마다 든 생각: 나는 분명 저 음식을 먹고 돼지로 변했을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솔직히 이 꿈을 처음 꿨을 땐 그냥 웃겼다. 고작 꿈에서 먹고 싶은 음식 못 먹었다고 울며 불며 잔 나 자신이 웃기고, 먹는 것에 얼마나 진심이면 이런 꿈을 다 꿀까 싶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네 번... 같은 꿈이 반복될수록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하던 프로이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이 꿈의 요점은 음식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인데, 절대 불가침 성역인 밥 먹는 시간을 쫓기며 방해받는 꿈까지 꾼 걸 보니 무의식 중에 심리적 압박을 많이 받고 있었던 듯하다. (전문가 아님 주의)


누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열심히 살라고 떠밀거나 재촉한 건 아니다. 심지어 이놈의 열심히는 내가 뭣도 모르던 유치원, 초등학생 때부터 함께 해왔다. 혹시 유전자에 열심 DNA가 따로 있는 건 아닐까?




퇴사를 하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면서도 한시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무언가에 몰두하는 나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퇴사 후에 더 바쁘냐고 묻는다. 퇴사 전보다 글을 업로드하는 주기가 길어진 이유도 글쓰기 외에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들도 손을 대기 시작하면 사소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가볍게 하는 방청소도 꼭 대청소가 되고, 방에 있는 조명 하나 바꾸려다가 온 인테리어를 다 손 보고 만다. 자는 걸 그렇게 좋아하던 나인데, 요즘은 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다.


일에 쏟던 에너지를 다른 쪽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건가. 갑자기 '열심'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궁금해졌다.

열심(熱心): 어떤 일에 깊이 마음을 기울이는 것

정의 출처: Oxford Languages


음, 내 행동이 사전적 정의에 부합하는 건 맞다. 그런데 난 왜 열심히 살게 된 걸까?


일반적으로 열심히 사는 건 사회의 미덕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나는 사회적 미덕을 수용하고 따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좋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에는 반골기질을 내보이지만, 미덕=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잠시 학생 때 배웠던 경제 수업과 엮어서 말해보자면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급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초기에는 경공업 위주로 발전되면서 소위 말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이 사회의 주를 이루었다. 인간의 노동력이 곧 생산력이 되던 사회에서는 당연하게도 근면한 삶의 태도를 장려했다.


근면성실함이 곧 돈이 되던 세상. 과정과 결과에서 부조리함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차원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열심히 살던 사람들 덕분에 나라는 전례 없는 급성장을 이룩했고, 사회는 눈에 띄게 발전해나갔다.


미덕은 법으로 정해진 사항이 아니며 보통 사회 저변에서 지향하는 가치를 담고 있다. 법 역시 사회적 합의에서 도출되는 결과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사회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고자 한다면 추구하는 미덕을 보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열심히'가 미덕으로 추앙받던 사회 분위기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2021년의 끝물에 다가가고 있는 현재는 4차 산업혁명을 넘어 5차 산업혁명까지도 입에 오르내리는 시대다. 지식과 혁신, 창의성을 중시하는 산업들이 큰 기둥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열심히 사는 것이 미덕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온갖 미디어를 통해 근면성실을 바탕으로 한 성공신화를 떠들어대고 있다. (엄마 서민갑부 좀 그만 보세요)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미덕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친다. 하지만 대체로 열심히 사는 만큼의 적절한 보상은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큰 모순이다. 그리고 이러한 괴리가 열심히를 미덕이 아닌 족쇄로 만든다. 개인의 희생이 깔려있는 사회적 미덕 추구가 과연 옳은 걸까? 그렇다면 그건 더 이상 미덕이 아니지 않을까?


무언가에 깊이 마음을 기울이는 건 좋은 일이 아닐 리 없다. 온 마음과 열정을 쏟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 일에 애정이 있다는 반증이다. 단, 내가 원해서 일때만.


원치 않음에도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면, 정말 애정을 쏟아야 할 일에는 에너지가 방전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새의 나를 되돌아봤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은 정말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일들일까. 아니면 어떻게든 미덕을 따라보려고 발버둥 치는 걸까.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 순간이 정말 내가 느끼는 행복일까. 이 조차도 타인에 의해 정의된 감정인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바람에 글을 쓰며 정리해야겠다 싶었는데, 쓰다 보니 더 미궁에 빠져버렸다. 개요 없이 흘러가는 대로 글을 쓰면 이렇게 된답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으로 보이겠지만, 앞으로는 나라도 열심히를 미덕으로 삼지 않아보려고 한다. 3n년을 살던 패턴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게 분명하다. 말은 이렇게 해놓고 또 나도 모르게 매사에 열심히 살겠지.


그러나 구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의심해 볼 것이다. 나만의 열심 포인트를 찾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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