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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직요괴 Nov 14. 2023

회사에 다녔을 뿐인데 사람이 바보가 됐어요

성격파탄자가 된 직장인의 종착지가 혹시 여기인가요

퇴근길, 만원 버스의 기다란 봉에 몸을 기대어 퇴근의 즐거움은 만끽하지 못한 채 하루동안 부족했던 순간만을 곱씹는 나를 발견하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난 나의 글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한 편을 꼽자면 단연 이것이다.


[회사에 다니면서 성격이 파탄 났다]


말 그대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의 모습을 날 것으로 담아낸, 다시 보니 왠지 약간 부끄러운 글이다. 그 이후 벌써 2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직장에 몸 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냐고?

이제는 성을 낼 기력도 남지 않은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이직요괴라는 컨셉 상(?) 브런치에서 맨날 우는 소리로 가득하지만, 현실의 나는 꽤 쾌활하고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 중 한 명이다. (익명의 공간이니 당당히 이야기해봅니다) 마음 맞는 동료들을 만나 즐겁게 일하기도 하고 애정을 쏟는 일에 주말 밤낮 할 것 없이 몰입하기도 하는, 살짝의 굴곡이 더해진 나름 평범한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그런 직장인 말이다.


다만 한해 한해 시간이 지날수록 불합리함에 쌍심지를 켜고 납득되지 않는 일에 되물음을 반복하는 일은 조금씩 줄어갔다. 물론 아쉽게도 그 성질머리가 싹 다 죽진 않았지만, '뭐 회사가 다 그런 거 아니겠어' 같은 시니컬한 멘트를 던지며 내가 처한 상황을 별나게 여기지 않으려 많은 노력을 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항상 힘들고 괴로워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를 되돌아보자니 모든 불평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의기소침해진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좀 덜 예민하게, 튀지 않게, 남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버티고 싶어졌다.


절이 싫지만 떠날 용기도 없는 중 주제에 괜히 눌러앉아 절 분위기만 흐린다는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8년 차 직장인으로서 이제는 열정 없이도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열정과 열심의 정도가 상당히 비례했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회사에 대한 애정과 로열티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월급으로 치환되는 책임과 의무에는 열성을 다하는 데 제법 능숙해졌다. 


웃긴 건 이런 스스로를 '요괴 정말 직장인 다 됐네~'하며 내심 뿌듯해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간절하게 트랙 위 달리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으면서 막상 익숙한 트랙에서 꾀부리는 법을 알게 되자 그냥 이렇게 버티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아는 나는 확실히 남들보다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구석이 있어 조직에서 오래 버티기 쉽지 않다. 다년간의 시행착오를 통해 겨우 얻어낸 통찰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를 부정하고 싶었다. 낮은 기대치와 기계적 성실함을 갖춘다면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막을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함으로 인해 버티지 못하는 나와 버티고 싶어 하는 나 사이의 충돌이 연이어졌다.






회사생활이정말쉽지가않다아휴그런데뭐어쩌겠냐다들이렇게사는거지월급날기다리면서


자잘한 소비와 알콜, 또는 간혹 괜찮다고 느껴지는 날을 낙으로 삼으며 그럭저럭 성실하게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코스프레에 심취한 가운데, 점차 내면 어딘가가 텅 비어갔다.


잦은 악몽 때문에 수면의 퀄리티가 낮아져 아침에 재깍 일어나는 일이 어려워졌다. 

집중을 해야 하는 순간에도 생각이 한 데 모이지 않고 자꾸 흩어졌다.

머릿속의 이야기를 말로 설명하려고 하면 갑자기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통찰력 있고 깊이 있는 사고를 하기가 힘들어졌다.


내가 원래 이렇게 말을 못 했나? 원래 이렇게 해결책을 찾는데 오래 걸렸나? 원래 이렇게 다른 사람 말을 잘 못 알아들었나? 도통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병원의 도움도 받았다. 증상에는 도움이 됐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도 해결해 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이러한 증상들이 나를 무능력하고 불성실한 회사원으로 보이게 하는 것 같아 무서웠다. 어렵게 숨겨오던 부족함이 전면에 드러난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어떻게든 나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수면 아래로 발버둥 치는 횟수만 늘어갔다.



미래를 위한 고민을 해도 모자랄 시간에 회사에서의 하루가 버틸만했는지에 따라 삶의 의지가 널뛰는 날 보며, 결국 바보가 되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깨달으면 달라진다고 했다.


우습게도 바보가 됐단 걸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고민이 꽤 가벼워졌고, 좀 더 나은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아직 완전 바보 단계까진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더욱더 골든타임을 놓칠 수 없다. 이 타이밍을 놓친다면 나는 완전 바보 단계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땐 정말 돌아올 길이 너무 멀다.


그렇게 난 인생의 챕터 2를 열어보기로 결심했다. 회사 알러지로 진절머리를 치며 브런치에 첫 글을 발행한 지 2년이 넘어서야 제대로 된 용기를 냈다. 사실 흘러간 시간에 비해 마련된 대책은 크게 없다만 2023년 11월의 난 조금 더 나이를 먹었고, 나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우선은 그걸로 충분하다.


아무튼, 진짜로 반갑다 인생 챕터 2야. 모쪼록 앞으로 잘 지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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