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
오늘 글은 그동안 내가 여러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아직까지도 결론을 내지 못한, 그런 문장에 대한 짧은 이야기이다.
아니, 사실 답은 정해져 있지만 정답대로 살 수만은 없는 현실과의 괴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글에서 '자아'는 인식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의미한다.)
따지고 보면 되게 웃긴 고민이지 않은가. 자아라는 건 어떨 땐 끄고 어떨 땐 켤 수 있는 그런 게 아닌데 전제부터 잘못된 문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막상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이와 같은 고민을 해보지 않은 직장인은 분명 드물 것이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잠시 구별되는 자아를 감추고 회사와 나를 동일시해야 하는 것일까.
여러 사람들이 같은 목표를 갖고 움직이는 회사라는 조직에서 나는 간혹 혹은 꽤 자주 개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맞닥뜨리고는 한다. '사회생활이 다 이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는 마법의 문장으로 포장되곤 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내게 종종 회의감과 절망감을 안겼으며, 이직요괴라는 깜찍한 닉네임까지 선사해주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대단히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옳다고 여기는 것에 방향성을 두고 살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은 하지만 말이다. 타고나길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반골적인 태도가 더해져 아주 약간은 정의로운 척을 잘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는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겪은 일들은 내게 크고 작은 충격을 주었고, 이는 계속되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이게 맞나? 진짜 이게 맞아?
한번 시작된 의문은 자꾸만 자아를 건드렸다. 회사에서는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라고 하던 선배와 어른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적당히 눈 감고 귀 막고 용납하며 지나가는 게 나에겐 왜 그렇게 어렵던지. 별난 사람 취급받을 때도 많았다.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니?
말해도 쉽게 바뀌지 않을 걸 알고 있다. 모난 돌 취급받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싫은 소리는 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도 싫은 소리이기 때문이다. (모난 돌 주제에 또 정은 좀 덜 맞고 싶어서 매번 세게 말하지 만은 않는다.)
물론 대부분 소 귀에 경 읽기,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느껴지기에 많이 지친다. 그래서인가, 오히려 남들보다 더 빠르게 번아웃 시기에 진입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떠오른다. 이 대목쯤에서 일부 주변인들이 내게 했던 말.
"그러게, 결국 너 손해라니까. 적당히 해 그냥."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외치던 말.
"아 그래, 내일부터는 진짜로 자아 없이 출근한다!"
다짐은 기가 막히게 해 놓고 또 성격상 그게 안 되는 게 함정이다.
나와 비슷한 직장인들의 패턴은 주기가 짧냐 기냐의 차이일 뿐 아마 아래의 흐름과 비슷할 것이다.
열정 존재 → 이해할 수 없는 사건 발생 → (의문을 가지고 고민 → 개선 시도 → 실패 → 다른 방법 시도 → 실패) x 반복 → 인내심 한계 도달 → 분노 표출 → 지침 → 회의와 자책 → 체념 → 무열정, 동태 눈깔로 출근 → 이직 혹은 퇴사
회사는 자아를 실현하는 곳이라는 현실성 떨어지는 소리를 대체 누가 시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로봇과 AI가 미래 인력을 대체한다는 내용의 SF 작품을 보면 보통 작품 속의 회사들은 로봇과 AI가 자아를 갖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던데 참 모순적인 노릇이다.
인간과 로봇, AI를 '자아'의 존재 유무로 구분할 수 있다면 자아는 곧 인간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직장인은 인간성을 포기해야만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극단적인 논리 결론까지 도달해버린다.
경영자와 고위 경영진으로 올라갈수록 사이코패스일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만약 이게 정말 맞는 내용이라면 탈회사라는 내 꿈은 날이 갈수록 더더욱 커져만 간다.
직장인으로서의 나 역시 자아의 한 부분이다. 하루 대부분의 생활을 회사에서 보내는 30대 미혼 직장인에게 회사라는 큰 부분을 제외하고 남은 것만으로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출근한 직장인에게 자아란, 있으면 피곤하고 없으면 무의미한 것.
적당한 선을 찾기가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