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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직요괴 Dec 26. 2021

30대가 생일을 보내는 방법

별다를 게 없는 듯 별다른

요 근래 잠시 브런치와 거리두기를 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고, 체력과 시간이 없었다.(사실 핑계다. 영상 볼 체력은 있었으면서)


성실한 글쟁이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한 스푼, 막힘없이 술술 글을 써내던 몇 달 전의 내가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 한 스푼, 마지막으로 여유로운 오후의 햇빛을 즐길 수 있었던 휴식기에 대한 그리움은... 아주 크니까 열 스푼 정도 되는 것 같다.


오랜만에 남의 글 읽기가 아닌 '내 글 쓰기'를 위해 들어온 브런치에는 생일 저녁 적다 남은 글 초안이 있었다. 그때가 11월 말이었으니 벌써 한 달은 족히 묵은 글이다. 당일에 올렸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마음을 담아 쓴 글을 이대로 묻어놓기엔 뭔가 아쉬워 다시 이어 써봤다. 생일날 저녁, 내가 했을 만한 생각을 곰곰이 떠올려보며.




매년 맞는 생일엔 항상 날이 춥다. 11월 말이면 겨울이니까 당연한 말이긴 한데.


아주 어렸을 땐 생일이 크리스마스 같았다. 마침 겨울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선물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는 날! 때로는 축하 연락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지난 인생살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환상을 잃어버리듯, 생일에 대한 감흥도 점차 줄어들었다. 본인의 생일조차 종종 잊고 지나칠 뻔하던 엄마가 이해되는 요즘이다.


치열했던 순간들도 시간이 지난 후엔 다 비슷해진다. 존재하지 않았던 내가 처음 세상에 얼굴을 내비친 그날, 나는 아마 태어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했을 것이다. 그리고 3n 년이 지난 지금의 난 그 순간을 기억하지도 못할뿐더러, 부모님에게 전해 듣는 출산 스토리에 '역시 아기를 낳는 건 쉽지 않구나.' 하는 무미건조한 반응만 보이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생일이어서 특별한 건 정말 없다. 한참 회의적인 사고에 빠져 살던 때엔 태어난 날에 의미를 두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생일이라고 신이 버프를 주는 것도 아니고, 생일을 기점으로 인생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새로운 해가 시작하더라도 보통 6개월은 바뀐 숫자에 적응을 못한다. 올해 초에도 어딘가에 날짜를 쓸 일이 생기면 습관적으로 2020을 적어 버리는 바람에 지저분하게 쓱쓱 긋고 '2021'로 고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2021년이 익숙해질 만하니 이젠 또 2022년이 온단다.(올해가 2021년이 맞는지 갑자기 헷갈려서 확인하고 온 건 비밀)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학년이 바뀌고 학교가 바뀌던 어릴 때와는 달리, 지금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어느 달인지도 헷갈릴 정도로 비슷한 매일을 살고 있다. 내일에 대한 특별한 기대가 없어서일까? 생일도, 새로운 해도 별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건.




그렇다고 생일이 반갑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반갑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장 먼저, 생일을 핑계로 평소 먹고 싶던 음식을 고민하지 않고 먹을 수 있다. 생일이 포함된 일주일을 일명 '생일 주간'이라고 명명하고, 자제해왔던 식탐을 한껏 발휘한다. "아 내가 이러려고 돈 버는 거였구나!" 하는 말이 나올 만큼 뿌듯하게 먹는다. 재정 상태만 넉넉하다면 매일이 생일이었으면 좋겠다.


분에 넘치는 마음도 받는다. 가족, 친구들, 자주 연락하고 지내지 못하던 주변 지인들, 밥 먹으러 가서 처음 본 식당 사장님까지도 생일이라는 한 마디에 웃는 얼굴로 축하를 건네준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감성적인 인간이 되는 건지 몰라도, 태어난 날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늘 하루 내가 누구보다 행복하기를 빌어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뭉클해지곤 한다.


전에도 그렇긴 했지만, 특히나 30대가 된 후 맞은 생일엔 나를 아껴주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되뇌며 다짐하게 된다.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내가 힘들 때만 찾지 않고, 기쁠 때 나누기 위해 찾아야지. 그리고 이런 다짐은 내가 삶을 온전히 붙들고 살아가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돌이켜본 나의 20대는 정말 정신없이 지나갔다. 크고 작은 변화도, 나름의 굴곡도 많았다. 그에 비해 30대의 삶은 비교적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늘 순조로운 상황만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진 내가 있다.


(▼ 영화 결말 스포일러 주의)


얼마 전 유튜브에서 <올 이즈 로스트>라는 영화 리뷰 영상을 보게 됐다. 요트 항해 경력이 오래된 주인공은 인도양 한가운데서 조난을 당한다. 우연찮은 사고에 이어 강한 폭풍, 심지어 상어 떼까지 만나는 그는 생사를 오가는 상황을 여러 번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지난 항해 경험을 바탕으로 죽을 뻔한 위기에서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결국 살아남는다.


어우 난 바다 무서워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올 이즈 로스트')


내가 느끼는 삶도 이와 같다. 예기치 못하게 마주치게 되는 고통과 좌절에도 꿋꿋하고 침착하게 버티며 살아남는 것. 별다를 게 없다는 건, 이미 겪어본 것이라는 말과 같다. 세상에 필요 없는 경험은 없다. 경험은 깨달음을 준다. 미처 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깨달음의 순간들이 시나브로 나를 이만큼 성장시켰고, 힘듦을 의연하게 이겨낼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덕분에 비슷한 매일을 살며 인생이 조금 재미 없어졌다고 해도, 사소한 행복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다고 느낀다.


그렇게 올해의 생일도 별다를 게 없는 듯 별다른, 특별할 게 없는 듯 특별한 하루를 곱씹으며 끝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겨우 30대에 벌써 이런 세상   사람 같은 소리를 해버리면 앞으로 40, 50, 60...  이후에 생일을 맞은 나는 과연 어떤 말을 남길까? 걱정 , 기대 . 남은 인생을 궁금해하며 우선 2021년부터  마무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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