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직요괴 Nov 23. 2021

회사는 나의 뮤즈다

한량 브런치 작가는 의외로 괴롭다

회사에 다닐 땐 드러나는 감정만 적어 내려가기에도 빠듯했다.

용오름처럼 솟구치는 기분이 글을 절로 만들어줬다. 글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하지만 퇴사 후 잔잔한 삶의 궤도에 안착한 이후로는 놀랍게도 글쓰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스트레스와 분노가 글의 원천이었는지, 여유와 행복만을 만끽하는 요즘은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꽤나 길어지고 있다.


초등학생 때가 생각난다. 일기를 어떻게 쓰는지 도통 감을 못 잡던 어릴 때의 나는 매일 저녁이 괴로웠다. 보통 그날 했던 일들 중 하나를 고르곤 했는데, 학교 가고, 밥 먹고, 친구들이랑 놀고, 학원 가고... 비슷하게 이어지는 나날에서 늘 다른 이야기로 글을 적는다는 건 어린 에세이 작가에게 제법 힘든 일이었다.


특히 제목을 정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일기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한참을 울상 짓고 있으면 엄마, 아빠, 할머니가 어떻게든 도움을 주셨다. 제목만 정해지면 어찌어찌 내용은 채웠던 것 같다. 그렇게 꾸역꾸역 쥐어짜듯이 기억에 남는 일을 적는 날이 대부분, 도저히 쓸 말이 없는 날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날에 쓰던 치트키 같은 제목이 있다.


'제목을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는 날'


디테일은 조금 다를 수도 있으나 대충 저런 제목이었다. 베란다 창고 어딘가에 오래된 일기장들이 전부 있을 텐데 꺼내볼 엄두가 나지 않아 확인은 못하겠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편법 같은 제목이라 자주 쓰면 선생님한테 티 날까 봐 아끼고 아끼다가 가물가물해질 때쯤 한 번씩 쓰곤 했다. 나름 전략가였다.




왠지 지금 같은 상황이 예상되었던 터라 퇴사 전 친구들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만두는 날까지 에피소드를 열심히 축적해서 나가야겠다'라고. 반은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렇게 현실이 되었다. 심지어 생각보다 일찍 퇴사하게 된 덕분에(?) 에피소드 축적에도 실패한 듯하다.


미리 저장해뒀던 주제와 초안들도 바닥을 보여간다. 모범생이었던 초등학생 때는 일기를 써가지 않으면 선생님한테 혼날 게 무서워 답답한 마음에 어떻게 써야 하냐며 울기도 했다. 다행히도 이제는 혼날 선생님도 없을뿐더러 그렇게까지 답답한 마음은 없지만, 글쓰기라는 새로운 취미를 잃을까 봐 그게 쬐금 무섭긴 하다.


사실 이 글의 제목도 이렇게 쓰일 예정은 아니었다. 맨 처음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할 때 앞으로 쓸 글들의 대략적인 개요를 제출했어야 했는데 그때 이미 정해놨던 문장이었다. 당시엔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이 없었고, 다니기 싫지만 어떻게든 다녀야 했기에 '작품의 뮤즈라고 생각하면서라도 잘 다녀보자' 하는 마음으로 적은 제목이었다.


계획해둔 대로라면 이미 발행했어야 하는 글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잘 다녀보자' vs '그냥 때려치우자' 중 후자가 우세한 상황이 오면서 차일피일 미뤄졌다. 결국 이렇게 사용되다니. 역시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이 맞다.


인간 이직요괴로서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요즘이다. 보고 싶은 영상물이 생기면 밤을 새워 보기도 하고,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재료를 사 와 요리한다. 노트북으로 좋아하는 재즈와 보사노바 음악을 틀어놓고, 사랑스러운 고양이들과도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다. 3n 년 인생 중 가장 행복한 때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반면 작가 이직요괴에게는 방황의 시간이다. 일과 삶에 대한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혹은 다른 글 주제를 찾아야 한다. 예술가에게는 정말 헝그리 정신이 필수일까, 앞뒤로 막다른 길과 절벽 같은 배수진을 쳐야만 글이 나오는 사람이었던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감정들을 놓치지 않고 맛보기 시작했다.


자칫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기쁨, 슬픔, 분노, 후회 등의 감정 하나하나를 붙들어 곱씹고 음미한다. 어디서 흘러온 건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이렇게 집중하고 몰두해야만 글을 쓸 수 있는 감성이 올라온다. 어떨 때는 해가 드는 오전에, 어떨 때는 해가 다 지고 난 한밤중에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글로 남기는 연습을 한다.


팔방미인이 꿈이던 내가 정말 못하겠다고 인정한 게 하나 있다. 바로 '연기'다. 대학교 때 교양과목으로 연기를 해야 하는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다. 나라는 사람이 발연기의 대가라는 걸 제대로 알 수 있었던 강의였다. 학점만 아니었으면 진작 포기했을 테다. 성적에 대한 악착같은 집착으로 F는 면했지만 아직도 쓴 기억으로 남아있다.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런 식으로 감정을 공부하는 방법을 말씀해주셨던 것 같은데, 솔직히 그땐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이젠 살짝 알겠다. 연기와 글쓰기는 감정을 관통해야 한다는 점에서 맥락이 비슷하다. 지금 그 수업을 다시 들으면 진짜 잘할 자신...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랬다.


보다 다양한 글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매거진 주제도 정해야지. 회사가  뮤즈였던  맞지만 뮤즈님은 현재 휴가 갔다. 영영 떠날 수도,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근데  그다지 순애보인 성격은 아니라 새로운 뮤즈를 찾아봐야겠다.


마침 신나는 재즈 팝이 흘러나오고 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에너지를 다시 충전하고 우선 점심을 먹어야지. 오늘 점심은 꽈리고추 멸치 주먹밥에 얼큰한 라면이다.



작가의 이전글 새로운 일을 좋아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