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맛집 후기인가 에세이인가
외근이 있어 오랜만에 차를 끌고 간 월요일 출근길, 교통사고가 났다.
월요일임을 제대로 실감하게끔 무지하게 서행 중이던 도로였는데, 거의 정차상태에 있던 내 차를 뒷 차가 들이박았다. 나름 경미한 사고였기에 오른쪽 무릎을 키박스 부근에 박은 걸 제외하고는 다행히도 큰 신체적 부상은 없었다.(차는 오늘에서야 수리를 맡겼는데 생각보다 부상이 큰 상태라 해서 놀랐지만)
병원에 가서 검사했을 때도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인다 하여 한숨 돌리고 있던 중, 상대측 보험사에서 대인 보상금을 보내왔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왠지 내게 닥친 액운을 금전으로 치환한 것 같아 빨리 써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보상금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당연하게도(?) 밥을 사라고 했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정확히 언젠지는 기억도 안 나지만 최소 내가 중학생 때부터는 갔던, 우리 동네 대표 맛집으로 손꼽히는 중식당이 있다. 맛있고 친절한데 가격까지 합리적인. 그러니까 잘될 수밖에 없는 식당의 삼박자를 갖춘 그곳은 갈 때마다 늘 웨이팅 명단과 늘어선 줄이 기다린다. 거의 20년 가까이 우리 가족의 외식메뉴 유력 후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식당. 오늘 역시 특별하다면 특별한 날인 만큼,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점심시간에 맞춰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30분 넘게 차가운 복도에서 오들오들 대기해야 했다. 기나긴 대기 시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다 문득 눈앞에 들어온 메뉴판을 보며 호기롭게 말했다.
오늘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남은 건 포장해가면 되니까.
그런 나를 보며 아빠는 후회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난 정말 받은 보험금을 몽땅 써버릴 자신도 있었다. 딱히 할 일도 없겠다, 우리는 메뉴판을 정독하며 미리 주문을 정해 보기로 했다. 중식당 특유의 화려한 라인업이 배고픈 내 위장을 자극한 덕분에 쉴 새 없이 군침이 돌았다. 우선 아빠가 좋아하시는 양장피부터, 그 집에서는 꼭 먹어야만 하는 탕수육, 빠지면 섭섭한 고추잡채도 시켜야지. 물론 짜장면, 짬뽕도 빠지지 않을 예정이다. 대충 주문할 메뉴의 윤곽이 그려질 때쯤, 구세주처럼 나타나신 가게 매니저님이 대기자 명단에 있던 내 이름을 불러 입장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테이블에는 따뜻한 자스민 차와 함께 메뉴판이 놓였다. 이미 대기하면서 그렇게 들여다봤었는데도, 우리는 마치 처음 읽는 책 마냥 설레는 마음으로 메뉴판의 첫 장을 넘겨 보았다. 코스류, 요리류, 식사류, 음료류 등 종류별로 나뉘어있는 메뉴판에서 거침없이 요리류 페이지를 펼쳐 미리 약속된 메뉴들을 신속하게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자스민 차를 연신 홀짝 거리던 나는 가게의 인테리어를 둘러보며 새삼스럽게 세월을 실감했다. 예전의 가게는 마치 옛날 홍콩 영화에 나오던 식당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톤 다운된 붉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져 칠해진 나무 의자와 식탁, 중식당에 가면 으레 볼 수 있는 그런 소품들까지. 하지만 몇 년 전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마친 지금의 식당은 왠지 파스타를 팔 것만 같은 분위기의 모던한 인테리어로 바뀌어있다. 깔끔하고 넓어진 가게가 좋으면서도 그때의 모습이 그립기도 한, 그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음식이 서빙됐다.
물론 위에 저게 시킨 요리 메뉴의 전부는 아니었다. 감출 게눈도 없이 음식을 흡입하며 맛있다 맛있다 하다 보니 흰 접시는 바닥을 보여갔고 배도 점차 불러왔다. 그러나 무얼 먹든 최종적으로는 탄수화물을 섭취한 뒤 그제야 식사를 종결 내는 것, 그것이 한국인의 국룰이 아니겠는가. 양심상 1인 1 메뉴까지는 너무한 것 같아 나눠 먹을 요량으로 짜장면 곱빼기와 국물 없는 해물 짬뽕까지 추가했다.
그 오랜 시간에도 변하지 않은 짜장면 맛을 음미하다 보니 갑자기 어릴 때 생각이 났다. 제 힘으로 돈을 벌지 못하는 학생에게 중식당 최대 호화 메뉴는 당연 탕수육이었다. 요리류/식사류의 구분 따위는 알 리도 없었고, 탕수육 없이도 누군가 짜장면 곱빼기만 사주면 양껏 기분이 들떴던 그때.
돌이켜보면 그 가게를 찾아갔던 길고 긴 시간 동안 우리 가족에게는 참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쬐끔 넉넉할 때도, 쬐끔 많이 부족할 때도 있었을 테다. 맛있는 걸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자식들의 입을 다물게 할 비책으로 왔을 식당. 짜장면 짬뽕만 시키기에는 왠지 외식으로서의 구색이 부족할까 싶어 얹었던 탕수육. 이제 와서 메뉴판을 다시 보니 탕수육 말고도 저렇게 많은 요리들이 있었구나 싶다.
내돈내산이 가능한 어른이 된 지금은 요리류/식사류 할 것 없이 그냥 먹고 싶은 걸 고른다. 그렇다고 샥스핀(안 좋아한다), 불도장 뭐 그런 고오급 메뉴를 턱턱 주문하는 배짱까지 갖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생겼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한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난 이 변화를 크게 깨닫고 있지 못하던 차에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가게에 들어오면 늘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부터 먼저 골랐던 것 같은데, 이제는 짜장면 짬뽕이 일종의 후식이 되었구나. 비록 이번엔 불로소득으로 한 턱 쏘는 거긴 했지만, 그래도 가족들에게 맛있는 걸 배부르게 사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소한 행복이다.
아무튼 간만에 찾아간 단골 식당에서는 중식 중 탕수육이 최고 존엄인 줄 알았던 어린 나를 마주쳤다. 가끔 이렇게 흘러간 시간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올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른다. 내가 계속 나이를 먹고 있구나. 시간이 흐르고 있긴 하구나. 실감이 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후, 계산대 앞에 선 나를 막아서지 않는 부모님을 보며 다시 한번 실감이 났다.
나 어른된 거 맞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