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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직요괴 Aug 14. 2022

조직을 무너뜨리는 조용한 암살자, 무(無)권한 상태

권한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한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글 쓰기에 굉장히 소홀했었는데 얼마 전부터 써보고 싶던 주제 하나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주말 저녁 노트북을 열어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말았다.


게으른 완벽주의인 나는 브런치에서 이런 알림을 받을 때마다 굉장한 죄책감이 들었다. 이제... 해방?


여러 조직에서 다양한 문제를 경험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꼈던 불편함이 있었는데, 최근 그 불편함의 기저를 어렴풋이 깨달으면서 한 번쯤은 생각을 글로 풀어내어 정리하고 싶었다.


굉장히 어렵고 미묘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라 내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듣게끔 쓸 수 있을지 조금 우려되긴 하지만, 우선 써 보려고 한다. 제발 이번 글은 마무리 지을 수 있길!





겉으로 보기엔 큰 문제없어 보이지만 왜인지 좀체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하거나 혹은 퇴보하고 있는 조직이 있다면, 먼저 현재 조직이 무(無)권한 상태인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조직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표면적으로 참 다양할뿐더러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인과관계도 굉장히 복잡하기 때문에 문제를 범주화 하기는커녕 본질적인 원인을 찾는 일부터 쉽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곧 결과로 이어지는 법, 지표는 현실을 냉정하게 반영하기 마련이다.

눈물 나는 지표에 대표는 가장 먼저 임원진을 소환해 묻는다.


뭐가 문제인 것 같아요?


임원진들은 나름의 추측 혹은 근거를 들어 문제의 원인을 이야기한다.


시간과 인력이 부족해서,

최근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서,

경쟁사의 공격적인 세일즈 마케팅 전략 때문에,

예상치 못한 시기적 이슈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서,


모두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게 다일까?




모든 조직은 역할과 책임 그리고 권한으로 구성되어있다. 

- 역할: 자기가 마땅히 하여야 할 맡은 바 직책이나 임무

- 책임: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어떤 일에 관련되어 그 결과에 대하여 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

- 권한: 어떤 사람이나 기관의 권리나 권력이 미치는 범위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조직이 작을 때는 혼자서 모든 것을 맡을 수도 있지만, 그 규모가 커지면 역할/책임/권한은 여러 구성원들에게 조밀하지만 차등적으로 나누어진다. 조직도의 상위에 위치할수록 실무보다는 관리 역할을 맡고, 더 많은 권한을 가지는 만큼 더 큰 책임을 진다.


회사는 구성원들의 역할/책임/권한을 적절하게 관리할 의무가 있고, 구성원은 본인의 역할/책임/권한을 충실히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관리자 급의 구성원은 실무의 비중이 낮기에 자신의 책임과 권한을 적시 적소에 사용하는 것이 그들의 근본적인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이란 매 순간이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다. '일'이란 더더욱 그렇다. 회사에서는 작은 선택 하나도 자칫 나비효과를 일으켜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결정일 수록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고려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볼 때 이는 효율성과는 정반대의 선상에 있는 이상적인 이야기이다. 대신 회사에서는 수직적인 구조의 의사수렴 체계를 마련하고 상위 관리자에게 의사결정 권한을 부여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권한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른다. 

그리고 그 말이 무색하게 조직에서는 무책임한 구성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본인이 권한을 가지고 내린 의사결정에 따르는 책임을 회피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하는 사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 글의 제목을 '무책임 상태'가 아닌 '무권한 상태'로 정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직위가 높은 구성원의 무책임이 만연한 조직일수록 무권한 상태가 되어있을 확률이 높다.


컨펌 절차는 허울뿐인 체계가 되고, "내가 책임진다"는 말이 그저 공수표 같은 공허한 메아리로 취급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경험 상, 이는 전염성이 굉장히 강하며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 전반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상위 결정권자가 실질적인 책임을 기피하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구성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렇게 학습한다.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건 결국 내가 피곤해지는 일이구나


이제는 작은 결정조차도 어려워하고 미루게 된다. 일이란 모름지기 선택과 결정이 있어야 진행이 되는 법인데 누구도 그 과정을 기꺼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의미 없는 길고 긴 회의가 이어진다. 주제는 던져졌으나 오고 가는 대화는 두리뭉실하고 소모적일 뿐이다. 중언부언, 같은 말을 조금씩 다르게 반복한다. 분명 각자의 역할이 나누어져 있지만 자꾸만 자신의 역할 범위를 축소하고 업무를 서로의 경계선 상에 위치시키려고 한다.

상위 결정권자들은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말 끝을 흐린다. 그저 본인의 생각일 뿐이니 최종적인 선택은 실무자들이 하라며 나름 배려하는 것처럼 위선을 떨기도 한다. 

마침내 회의는 마무리되었으나, 명확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애매하고 추상적인 결론만 남아있다.


이것이 바로 무권한 상태이다. 권한이 있으나, 누구도 그 권한을 제대로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그런 상태 말이다.




무권한 상태에 이른 조직을 되살리기는 쉽지 않다.


먼저, 우리 조직이 무권한 상태라는 걸 알아채는 것 자체가 어렵다.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심리적 태도에 기인하며, 눈에 보이는 움직임이 있다거나 1차원적인 인과관계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상위 결정권자들의 무책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욱 조용하고 교묘하다.


그저 정신을 차려보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직이 큰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 되어있는 것이다.


오르막길과 달리 내리막길엔 가속도가 붙는다. 

그만큼 조직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것을 도려내야만 한다. 사람부터 시스템까지.


새로운 구심점을 마련하여 매우 유기적이고 유연하게 움직여야 한다. 이러한 대응을 위해서는 구심점 역할을 맡는 사람이 분명해야 하며, 그에게 적절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 뒤 그 권한과 책임이 제대로 운용되고 있는지 체계를 통해 꾸준히 감독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망가진 조직을 복구하고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애초에 조직이 무권한 상태까지 이르지 않도록 회사가 구성원들의 역할/책임/권한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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