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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직요괴 Jan 07. 2024

새해 버킷 리스트

지금은 아니지만 꽤 오랫동안 플래너를 사용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30대 초반 직장인 시절까지 10년은 족히 넘는 기간이다. 가방 안엔 늘 언제든 무엇이든 적어둘 수 있도록 펜 한 자루가 함께 들어있었고, 언젠가부터 휴대폰 캘린더, 노션, 슬랙 등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 전까지 수많은 일정들을 알차게도 관리해 주었다. 


매년 연말이 되면 새해를 위한 플래너를 미리 준비해두곤 했다. 고등학생 때는 소위 말해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꽤 즐기던 편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없는 to-do와 일정을 한눈에 정리할 수 있는 심플한 디자인을 선호했다. 스타벅스에서 e-프리퀀시를 모으면 받을 수 있는 위클리 다이어리가 용도에 딱 알맞은 편이었다. 하지만 난 평소 커피를 잘 마시지 않기에 주변 친구들이 종종 프리퀀시를 나눠주었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플래너가 손에 들어오고 나면 가장 먼저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두었다. 남에게 들키면 안될 일기는 쓰지 않았지만 일상과 관련된 대부분의 것을 기록해 두는 편이었기에 잃어버리면 아주 곤란할 터였다. 적어둔 이름과 연락처가 부적처럼 작용한 덕분인지, 아니면 하도 애지중지 끼고 다녀서 그런지 몰라도 다행히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은 없었다. 



정말 한 몸처럼 붙어다녔던 플래너의 흔적들



또 하나 잊지 않고 반드시 했던 일 중 하나가 바로 새해에 이루고 싶은 버킷 리스트 적기였다. 보통 플래너의 가장 뒷부분은 주로 편하게 메모할 수 있는 속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맨 앞장인지 뒷장인지를 펼쳐(안 쓴 지 오래돼서 조금 가물가물하다) <20XX 년 버킷 리스트>라는 제목을 쓴 뒤 1번부터 번호를 매겨 쭉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실제로 썼던 내용을 찍어 올리고 싶었으나 사용했던 플래너들은 현재 모두 본가 창고 어딘가에 쌓여있는 관계로 아쉽게도 패스.


버킷리스트라고 하니 다소 거창하게 들리려나 싶어 첨언하자면 그냥 그 해 안에 이루고 싶은 목표 정도로 생각하고 적었다. 각종 자격증 따기, 여행 가기, 운동하기 등등 새해라면 으레 결심하는 일반적인 것들이었다. 그렇게 적어둔 채로 까무룩 시간이 흘러 새 플래너로 바꿀 때가 되면, 품에 하도 끼고 다녀 닳은 티가 역력한 플래너를 펼쳐 리스트를 지워나가는 게 일종의 의식 같은 습관이 되었다.


삭선을 긋기 위해 다이어리 뒤쪽을 뒤적이며 펼칠 땐 마치 땅에 묻어둔 타임머신을 꺼내 열어보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정말 신기한 건 적어놓은 내용조차 잊고 지냈음에도 리스트에 있는 대부분의 항목에 줄을 그을 수 있었단 거다. 의식하고 지내진 않았지만 고민하며 적어 내리던 나의 마음가짐이 꽤나 단단했었나 보다.


1년 전의 나는 이런 다짐들을 했구나, 이런 걸 이루고자 했구나, 그리고 참 열심히 살았구나. 




종이 플래너에서 디지털 플래너로 넘어간 뒤에는 그전만큼 꾸준히 쓰지 않게 되었다. 회사 내부적으로도 일정을 관리하는 툴이 다양했기에 중복해서 적어야 한다는 점이 번거롭고 귀찮았던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싶다. 업무적으로 필요한 자잘한 메모 역시 회사에서 사용하는 메신저 프로그램을 이용해 남겨두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연간 버킷 리스트' 의식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고 난 지금은 나를 옭아매는 어떠한 툴도 없다. 그래서일까, 문득 다시 종이 플래너가 떠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연초에 적던 버킷 리스트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2023년의 나는 어떤 걸 이루고 싶어 했을까? 바랐던 일들을 잘 해냈던 한 해였나? 분명 무언가 결심했을 것이고 성취한 것들도 있을 텐데 왜인지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이 디지털 치매인가...


흘러가는 순간들을 조금 더 빼곡히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올해는 다시 종이 플래너로 돌아가 나의 일상을 손으로도 기록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맨 뒷장에는 2024년 버킷 리스트를 적어두어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선물처럼 펼쳐볼 것이다. 또다시 1년을 성실하게 보낸 나 자신을 마음껏 칭찬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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