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살, 2005. 11. 12. 토요일>
2005년 어느 저녁,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나는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그 당시 진로에 대한 고민이 컸던 터라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곳에 가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나는 그때 호텔 지배인이 되고 싶었다.
'힐튼 호텔, 실란트로'
당시 서울 지리에 제법 밝은 친구가 나에게 그곳까지 어떻게 가면 된다고 일러줬지만, 막상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내리고 나니 나는 영락없는 어리숙한 시골 학생이 되어버렸다. 짧은 머리에 교복 차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낡은 운동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으로 휩쓸려 가서 어찌어찌 호텔 근처까지 가게 되었다.
도착해서 마주한 호텔은 밤이라 어두웠지만 어린 학생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곳의 직원들과 어색하게 인사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예약한 식당 입구 앞에 섰다. 안내를 받고 자리에 앉아 있는 한참 동안 내가 간 식당이 흔히 말하는 '호텔 뷔페'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왜 주문을 받으러 안 오지?' 생각하며 어색함에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낙서를 하고 있는데 옆에 직원이 지나가고 있었다.
"저기요, 주문은 안 받으시나요?"
하는 말에 그 직원은 "아, 여기는 뷔페라서 원하시는 음식을 가져다 드시면 됩니다 손님." 대답했다. 친절한 웃음으로 대했지만 모든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음식을 대충 접시에 담아다 앉아서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며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다들 익숙한 모습으로 웃고 떠들고 먹고 마셨다. 눈 둘 곳도 없어 내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 갑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유 없는 용기가 생겨났다. 내가 여기를 왜 왔더라?
"저는 나중에 호텔에서 일하고 싶은 고등학생인데요, 혹시 지배인 좀 불러주시겠어요? 꼭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아까 말을 걸었던 직원이 지나갈 때 한 말이었다. 직원은 "네?" 하고 되물었고, 다시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그렇게 몇 마디가 오가고 한참 뒤 그 직원은 굉장히 연륜이 있어 보이는 다른 직원을 한 분 데리고 왔다.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구요."
호텔의 식음료를 총괄하는 직함의 명함을 건네주시며 하신 말씀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나는 보다시피 지방에서 꿈이 뭔지도 모르고 공부만 하는 학생이다, 어릴 적 막연하게 가졌던 호텔리어라는 꿈을 이루고 싶은데 그 삶이 어떠한지 궁금하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다. 내 말을 듣고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다르게 그분은 본인의 얘기를 천천히 들려주셨다. 호텔리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 삶이 어떠한지, 그리고 고등학생인 내가 지금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대화 동안 기대와 실망이 선명히 교차되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한 접시 비우고 일어나 봐야겠어요!"
대화를 마치고 나는 그분을 연결해준 직원에게 눈인사를 하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걸었다. 걷다 보니 남산을 오르게 되었고, 걸을 때마다 펼쳐지는 서울의 야경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 불 빛들이 만들어내는 모습이 또다시 나를 압도하게 되었을 때 나는 어린 날의 고민을 정리할 수 있었다. 기대했던 모습과는 조금은 다른 호텔 일에 실망감도 들었지만, 오히려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더 나은 나를 위해 지금을 열심히 살아갈 에너지를 얻었다.
그렇게 마무리되었던 나의 서울 여행은 한 동안 잊혀져 있었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서 직장생활을 한 지 11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러다 아주 우연히 그때 나를 만나주셨던 그분의 성함이 생각이 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는데 그 호텔에서 지배인까지 하시고 은퇴하신지는 좀 되셨지만 블로그 활동을 하고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안부글을 남겨 인사드렸더니 감사하게도 내 블로그에 오셔 글을 남겨주셨다. 바로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 그때 그 고등학생이 지금은 다른 길에서 살고 있지만 그 날 만큼 용기를 내어 움직여봤던 적이 언제였나 싶습니다. 선생님께 좋은 영향력을 받았던 한 학생이 사회의 일원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는 소식을 꼭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한국에 가면 맛있는 음식 나누며 지나온 날들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린 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학생과 그 고민을 듣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준 사람. 언젠가 그날 같은 만남이 이루어지길 바라본다.
* 사진출처: 밀레니엄 힐튼 서울 (https://hilton.co.kr/hotel/seoul/millennium-hilton-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