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살, 2006. 7. 9. 일요일>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 책이 제법 쌓였다. 교과서는 물론이고, 기본서와 문제집 등이 한가득이라서 교실 뒤편의 사물함에 다 넣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책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말 그대로 공간이 부족했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책상이나 창가에 책을 높이 쌓아놓았는데 와르르 무너져버리기가 일상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떤 친구가 먼저 아이디어를 냈는데,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종이 상자로 책꽂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의자 밑에 쏙 들어갈 정도의 작은 박스에 테이프를 덕지덕지 감아 책꽂이로 쓰는 게 전부였지만 매우 실용적이어서 금세 유행이 되었다. '종이상자 책꽂이'에 자주 보는 책 대여섯 권을 넣을 수 있게 되니 책을 보관할 공간이 부족한 문제도 해결이 되고, 무엇보다 책을 가지러 사물함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다. 고3 수험생들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인 책꽂이였다.
거의 모든 친구들이 이 책꽂이를 만들 동안 나는 계속해서 가방과 사물함에 책을 넣고 다녔다. 그것을 만드는 게 귀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박스를 찾으러 가고, 테이프로 그것을 견고하게 고정하는 것 자체가 시간을 낭비하는 일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사물함도 꽉 차고 더 이상 책상 위에 책을 쌓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하는 수 없이 책꽂이를 하나 만들기로 했다.
책꽂이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 재료를 구할 생각으로 학교 매점에 들렀는데 적당한 사이즈의 상자는 없고 죄다 과자박스 같이 큰 것들만 있었다. 유행이 무섭긴 했다. 그 많던 박스들이 다 사라지다니. 차라리 친구들이 책꽂이를 만들기 시작할 때 같이 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에 가서 구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귀찮은 마음에 대충 아무 상자나 집어서 교실로 왔다.
재료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자리에 앉아 테이프를 칭칭 감으며 책꽂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중간쯤 되었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자가 너무 큰 나머지 책들이 반듯하게 고정이 되지 않았다. 또 의자 밑에 들어가지 않아 책상 옆에 두니 친구들이 다니는 길을 막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시작한 책꽂이 만들기를 멈출 수 없었다. 곧 있으면 자습이 시작되는 데다가 더 이상 이것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스의 남은 부분을 대충 테이프로 감고 그냥 쓰기로 하고 마무리를 했다.
이 생각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예상한 대로 책상 사이 통로를 막은 탓에 매번 친구들이 움직일 때마다 치워줘야 했고, 무엇보다 책꽂이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박스에 책을 버려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결국 다음 날 저녁, 나는 만들었던 책꽂이를 내다 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상자를 구하기 위해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마트로 갔다. 그곳에서 적당한 크기의 상자를 구했고, 다시 테이프를 감으며 새 책꽂이를 만들었다. 남들과 비슷한 모양의 튼튼하고 실용적인 책꽂이를 갖게 되었다. 진작 다시 만들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일을 시작하고 나면 중간에 그것을 그만 두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자신이 선택한 방법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순간 그동안 들였던 노력이 아깝게 느껴진다. 이 노력에 시간이 더해질수록 더 강한 관성이 붙는다. 그래서 결과가 좋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밀어붙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학교에 다닐 때는 이과를 선택하고 수학 성적이 필요 없는 대학에 지원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또 성적에 맞춰 대학 전공을 선택한 친구들 중 몇몇은 결국 전과를 하거나 반수, 편입을 선택했다. 처음부터 문과를 선택하거나, 원치 않은 과로 진학하는 대신 재수를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일을 할 때도 비슷했다. 직장생활 6년 차 때, 우리 부서는 크고 작은 이슈가 끊이지 않았었는데 부서장은 우리를 꾸짖는 대신 '실행이 답이다'라는 책을 선물해주었다. 누구라도 먼저 나서서 문제들을 해결하라는 메시지였다. 다행히 일단 뭐라도 해보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른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일을 나누다 보니 직무와 상관없는 엉뚱한 사람에게 일이 배정되는 게 다반사였고 '제 권한 밖의 일이라서..'라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나왔다. 결국 회의 시간마다 부서장 앞에서 '네 일, 내 일'을 따지는 상황이 되자 그동안 진행되었던 일을 멈추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모든 것을 충분히 고민해보고 시작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종이상자 책꽂이의 재료를 고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책꽂이를 만들기로 했다면 '책 대여섯 권을 넣기에 충분하고, 의자 밑에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의 상자를 찾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대충 보이는 재료로 책꽂이를 만들었다가는 결국 그것을 버리고 새것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만약 중간에라도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수정한다면 남아있는 소중한 시간을 지킬 수 있다.
사람들이 종이 책꽂이 만들기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이유는 자신의 선택이 실수였음을 인정하기보다는 이미 시작한 일을 끝까지 마치려는 편이 마음을 더 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결국 옷을 다시 입게 할 뿐이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은 옷을 샀다면, 몸에 맞게 수선하기 전 환불을 생각해보는 편이 낫다. 수선까지 마친 옷을 몇 번 입지도 않고 옷장 안에 넣어두고, 새 옷을 사는 실수를 반복할 이유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