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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난감공장 Apr 06. 2022

그림을 지우는 중입니다

<스무 살, 2007. 4. 12. 목요일>

  갓 태어난 아이는 4~6개월이 되면 이유식을 먹고, 빠르면 12개월 전후로 걷기 시작한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18개월 전후로 말이 급격하게 늘고, 24개월 정도가 되면 손에 포크를 쥐고 밥을 먹는 게 익숙해진다. 그 이후로는 어린이 집에 가거나,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친구들을 만나 사회성을 기른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공부를 시작한다. 그렇게 한 사람이 커간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한참 앞둔 1월, 사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식으로 생도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가입교'를 받아야 한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학교생활 사전 적응기간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일반적인 대학과 다른 학교라는 것은 알았지만 오리엔테이션을 참 일찍, 그리고 길게도 하는구나 생각했다. 가입교 시작일이 다가와 설레는 마음으로 머리도 자르고, 가서 입고 지낼 옷가지 등을 가방에 차곡차곡 챙겼다.



  학교에 도착해서 정해진 곳에 줄을 서고, 배웅을 와준 부모님께 신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윽고 군악대의 연주가 시작되고, 우리는 길 양 옆으로 늘어선 선배들의 환영을 받으며 행진했다. 마치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돌아와 환영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는데, 한쪽에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축하한다 후배들아! 웃을 수 있을 때 많이 웃어둬!" 



  기숙사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을 때, 행진 때 들었던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타난 생도 한 명이 속옷을 포함, 모든 옷을 벗으라고 한 뒤 침대에 가지런히 놓인 군용 속옷과 전투복을 입으라고 얘기했다. 내가 "팬티까지요? 탈의실은요?" 하고 묻자 잠시 정적이 흐르고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정신을 쏙 빼놓는 일들이 계속되었다. '해요'체 대신에 '다나까'로 끝나는 말을 쓰라고 하는 것을 시작으로, 걸을 때는 항상 팔을 앞뒤로 크게 크게 흔들며 직각으로 걸어야 한다는 것,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제약들이 따랐다. 궁금한 것이 있을 때는 지도생도 앞에 가서 '000 예비생도, 생활지도 생도께 용무!'라는 마법의 문장을 외쳐야 간신히 하나 물어볼 수 있었다. 그렇게 오리엔테이션인 줄 알았던 나의 '가입교'는 시작되었다.



  추운 겨울,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은 점점 비슷한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같은 곳에서 잠을 자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훈련을 받았다. 하루에 쓰는 말은 어느덧 몇십 문장 정도로 줄어들었고, 그마저도 군대에서 쓰는 말들이 전부였다. 시간이 갈수록 대부분의 예비생도들은 체력도 비슷해져 키와 덩치만 빼면 누군지 분간이 어려운 수준이 되었다. 그렇게 5주가 흐른 뒤에 우리는 비로소 생도대에 발을 들이며 정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생도가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생도대에서 우리를 맞은 건 가입교 첫날 우리를 도열하며 '웃을 수 있을 때 실컷 웃어두라'는 말을 하던 얄궂은 선배들이었다. 가입교 때는 우리를 지도하는 소수의 선배 생도들만 보다가 2, 3, 4학년 선배들을 보니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생도대에는 가입교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규칙들이 있었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어겼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옷을 삐뚤게 입었다고 혼나고, 시간을 지키지 못해 혼나고, 생활관이 잘 정돈되지 않아 혼나고, 주머니에 필기구가 없다고 혼나고, 그리고 웃었다고 혼났다.



  하루는 이런 생활이 너무 힘에 부쳐 생활관에서 의기소침해 있는데, 선배 한 명이 방으로 불쑥 찾아왔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도와주라며 한 명씩 매칭 해준 선배였다. 순간 긴장을 하며 자세를 고쳐 잡는데 선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힘들지? 가입교도 힘들었겠지만, 1학년 생활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 거야. 도화지에 그려진 그림을 지우고 새로운 그림을 그려 나가는 시기라고 할까?"



  힘든 것을 알아주는 것도 고마웠지만, 무엇보다 내가 처한 현실을 한 마디로 알려주어 마음을 다시 추르슬 수 있었다. 그림을 지우고 다시 그리는 시기. 20여 년을 살며 그려온 삶의 무늬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원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20년 된 그림을 지우고 있었다. 먹는 것, 걷는 것, 말하는 것, 나아가서는 생각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다. 학교 생활을 한 시간만큼 나라는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갓 입학한 생도는 가입교 때 '직각식사'를 시작하고, 빠르면 첫 주 차 전후로 '직각보행'을 시작한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3주가 되면 '다나까'체에 익숙해지고, 4주가 지나면 '총기 분해 결합'이 손에 익는다. 그 이후로는 생도대에 살기 시작하면서 동기, 선배들을 만나 사회성을 기른다. 교수부에 가면서부터는 공부를 시작한다. 그렇게 한 생도가 만들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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