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네 살, 2021. 10. 27. 수요일>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서술하시오."
과연 정답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뭔가를 한참 적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마지막 장에 교수님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교수님의 수업을 듣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마지막 시간까지도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 십 개의 답안 중 교수님의 눈에 띄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다른 과 친구들을 만나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친구 P는 코딩 과제를 하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 교수님, 이 부분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몇 날 밤을 새우며 공부했지만... %%" 하며 은근슬쩍 부족한 부분을 커버해본다고 했다. 또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친구 K는 공부하지 않은 내용이 시험으로 나오자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답지에 빼곡히 적어 제출했다고 했다. 코딩같이 실행 버튼 한 번에 결과가 나오는 과제에 편지라니, 묻지도 않은 말에 동문서답을 한다니! 교수님의 온정을 기대하고 편지를 쓴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사실 우리 말고도 이런 친구들은 주변에 흔했다.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교수님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친구도 있고, 수업이 끝나면 교수님께 몇 마디라도 말을 거는 친구, 심지어는 전략적으로 질문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지금 당신의 수업에 굉장히 흥미를 느끼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는 것을 어필하는 것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런 행동에 대해 아무도 다른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것이 어렸을 때부터 배워오던 '열심히 하는 방법'이었으니까. 성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명제. 숙제를 열심히 하면 하면 칭찬을 듣고, 노래를 우스꽝스러우리 만큼 최선을 다해 부르면 수행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가수 이무진의 '과제곡'이라는 노래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것은 무조건 성실히 사는 우리의 모습을 표현했기 때문인 것 같다.
예 교수님 과제는 다섯 개군요. 아뇨 불만 없어요 다 해올게요. 심지어 창작 과제가 두 개라고요? 잠을 줄여서라도 해야죠 암요.
그런데 이 노래 끝에 나오는 교수님의 말씀이 가관이다. "그걸 다 해왔어요?"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한 마디. 왜 애초에 다 하지도 못할 양의 과제를 주는 것일까. 불가능에 도전해보라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의 태도를 보겠다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는 후자의 경우에 더 익숙한 것 같다.
미국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한 첫 학기, 언어라는 장벽보다 더 크게 느껴진 것은 다름 아닌 수학이었다. 문과 출신으로 데이터 과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모든 과목에서 수학이 발목을 잡았다. 한국인들이 평균적으로 수학을 잘한다는 건 내 이야기가 아닌 게 분명했다.
특히 어렵게 느껴지는 과목이 있었다. 두 번째 시간까지는 분명히 평이한 내용들이었는데, 세 번째 수업이 되자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교수님이 칠판에 외계어를 빼곡히 적기 시작하더니, 수업이 끝날 때까지 칠판을 무려 일곱 번이나 지우고 다시 적었다!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매주 교수님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수업은 저만큼 나아가고 있는데, 내가 물어보는 대부분의 것들은 아주 기초적인 것들이었다. 그래도 교수님은 정성껏 질문에 대답을 해주셨다. 그래서 속으로 '성실함을 보이는 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군' 하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그날도 준비해 간 문제들을 질문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오히려 몇 가지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하셨다. 내가 대답을 잘하지 못하자, 종이에 문제를 몇 개 적으시더니 나에게 건네면서 하신 말씀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쭈뼛거리며 연구실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복도 끝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문제를 다 풀지 못하고 한참 동안 고민만 하다가 다시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교수님은 종이에 해답을 적어주시고는 '잘 가라'고 인사하셨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교수님의 연구실에 '태도를 보이러' 찾아갈 수 없었다.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했다. 질문이 있으면 수업시간에 했고, 길어진다 싶으면 쉬는 시간에 따로 이야기했다. 수업의 내용이 100% 이해되지 않더라도 내가 배우고 이해한 만큼은 실제 문제에 적용해보려 노력했다. 그렇게 학기가 끝나갈 때까지 내가 직장에서 하고 있는 일과 수업에서 배운 것들을 빠짐없이 연관 지어봤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개선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기록해 두었다.
성적이 발표되고, 그 과목에서 나쁘지 않은 학점을 받았다. 미국 대학원에도 태도 점수가 있는 것 같다. 다만 교수님께 얼굴 한 번 더 비추는 성실한 태도가 아닌, 배운 내용을 활용해보려는 태도가 좋은 점수를 받게 되는 것 같다. 사람마다 지식을 습득하는 정도는 달라도 결국에는 그 지식을 활용하기 위해 수업을 듣는 것이니까. 방향 없는 노력, 무식한 성실함보다는 이 일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보게 하는 미국에서의 첫 학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