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사서독과 사조영웅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
왕가위 감독의 네 번째 영화인 《동사서독》은 실제로는 세 번째로 촬영을 시작한 작품이다. 그의 첫 영화 《열혈남아》가 성공한 이후 두 번째로 연출한 《아비정전》은 흥행에서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고, 홍콩영화상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그런 왕가위가 당대 최고 스타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찍은 영화가 바로 《동사서독》이다.
하지만 제작은 순탄치 않았다. 왕가위 특유의 즉흥적 연출 방식과 예산 부족으로 촬영이 계속 미뤄졌다. 함께 제작을 맡은 친구 유진위는, 사막 한복판에서 촬영을 기다리는 톱배우들의 모습을 보다 못해 그 대기 시간을 활용해 아예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B급 코미디 《동성서취》다. 장국영, 임청하, 양조위, 양가휘 등 주연 배우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막장 코미디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며 《동사서독》 제작 자금에 보탬이 된다. 웃픈 사실은, 《동사서독》보다 《동성서취》가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는 점이다.
제작이 늘어지던 사이, 왕가위는 또 하나의 영화를 찍는다. 소품처럼 소규모로 만든 《중경삼림》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는 세계적으로 왕가위라는 이름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동사서독》과 《동성서취》는 모두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 이 소설은 한국에서 ‘영웅문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던 세 편짜리 무협 대서사의 첫 번째 작품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남송 말기로, 주인공은 곽정과 황용이지만 동사 황약사와 서독 구양봉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동사서독》은 원작의 설정만 차용했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훗날 무림 최고수가 될 인물들의 젊은 시절을 다룬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김용의 원작에서는 무림의 다섯 고수를 ‘천하오절’이라 부른다. 이 다섯은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남제 단지흥, 북개 홍칠공, 그리고 중신통 왕중양이다. 이들 중 영화에는 동사, 서독, 북개만 등장한다. ‘남제’는 송나라의 이웃나라인 대리국의 황제였던 단지흥을 가리키며, ‘중신통’ 왕중양은 도교 일파인 전진교의 창시자로 소설이 시작되기 전 이미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신통’이라는 별칭은 그가 천하제일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데 대한 경의의 표현이거나, 도교의 창시자로서 통달한 사람이란 뜻일 수도 있다. 동사, 서독, 남제, 북개 네 사람은 실력 면에서는 막상막하로 묘사된다.
곽정은 송나라 사람이지만, 아기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몽고 초원에서 자란다. 무협 주인공으로서는 특이하게 머리가 좋지 않은 편이라 초식을 잘 익히지 못한다. 그러나 심지가 곧고 순수한 성격 덕분에 수양에는 능하고 내공이 탄탄하다.
그가 몽고를 떠나 처음 중원 무림에 발을 들이고 강적을 만나 위기를 맞았을 때 도움을 주는 인물이 바로 북개 홍칠공이다.
‘북개’에서 ‘개’는 말 그대로 거지를 뜻한다. 홍칠공은 전국에 흩어진 거지들의 조직인 개방의 방주, 즉 수장이다. 개방은 무협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조직인데 개방 방주는 무림에서 꽤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이름은 ‘홍씨 가문의 일곱째’라는 의미의 홍칠이며, 존경의 뜻으로 ‘공’이 붙어 홍칠공이라 불린다. (명성을 얻는 것은 나중 일이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홍칠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의 대표 무공은 타구봉법과 항룡십팔장이다. 타구봉법은 ‘개 때리는 봉술’이라는 다소 황당한 이름이지만, 본디는 거지들이 지팡이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안한 실전 무술이다. 항룡십팔장은 무기 없이 펼치는 맨손 무공으로, 주역의 문구에서 따온 이름의 18가지 초식으로 구성돼 있다.
예를 들어 ‘잠룡물용’은 ‘잠겨 있는 용은 쓸 곳이 없다’, ‘혹약재연’은 ‘뛰어올라도 다시 연못으로 돌아온다’, ‘비룡재천’은 ‘용이 하늘을 난다’, ‘항룡유회’는 ‘하강하는 용에게 후회가 있다’는 뜻인데 주역 1장에 나오는 문구들로 인생의 보편적인 단계들을 표현한다. 이 중에서도 항룡유회는 항룡18장을 대표하는 초식으로서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홍칠공은 무림의 대종사로서 직접 싸우는 것을 자제하지만, 위기에 빠진 곽정에게 항룡유회를 전수하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돕는다.
홍칠공은 호탕하고 유쾌한 인물로 술과 음식을 즐기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고 의협심이 강하며 옳은 일을 행하는 데 있어 여지를 두지 않고 단호하다. 동사는 변덕스럽고, 서독은 사악하며, 남제는 개인사에 얽매어 황제의 지위를 버리고 은둔하고 있는 천하에서 북개 홍칠공은 협을 대표한다. 홍칠공은 서독 구양봉과 원래부터 상극이지만, 특히 황약사가 사는 도화도에 들어가 황약사의 딸인 황용의 짝으로 구양봉의 조카(형수의 아들) 대신 곽정을 밀어주는 과정에서 구양봉과 원수를 맺게 된다.
영화에서는 구양봉의 객잔에 머물면서 돈을 받고 사람을 대신 죽여 주는 일을 하고 있는 젊은 홍칠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가족의 복수를 원하는 소녀의 부탁을 받고 달걀 한 판을 댓가로 마적떼와 싸운 뒤 객잔을 떠난다. 사막을 떠나면서 먼 객잔까지 자신을 찾아온 일편단심의 아내와 동행하는데 이 역시 꼬여 버린 애정사에 고통받는 다른 주인공들과 다른 모습이다.
‘협’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정의의 요구와 내면의 진심이 일치하는 때 일어나는 마음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협의 마음을 품는 자는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허리를 세우고 가슴을 펴고 사막을 떠나는 홍칠공을 어두운 객잔 속에서 바라보면서 구양봉은 자신이 그와 같이 될 수 없음을 느끼며 몸을 구부린다.
동사는 북개와 서독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북개는 명분과 뜻이 하나 되어 주저함 없이 행동하고, 서독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움직인다. 동사는 세상의 평판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고수하지만, 무고한 약자를 해치지 않고 세상의 정당한 명분에 존중심을 갖는다.
불의를 응징하고 약자를 도우며 강호를 누비는 홍칠공과 달리 황약사는 대륙의 동쪽 바다에 있는 도화도에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은거한다. 도화도에는 그 자신을 제외하면 벙어리 하인들 뿐인데 이들은 강호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을 잡아다 혀를 자르고 귀를 멀게 한 이들이다. 한때 황약사에게는 아내도 있었고 제자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제자들 중 배신자가 생기고 그 여파로 마음 고생을 하던 아내가 딸 황용을 낳는 중에 숨지자, 황약사는 다른 제자들을 불구로 만들어 섬에서 내쫓고 어린 딸을 키우며 오로지 벙어리 하인들과 함께 섬에서 지낸다.
홍칠공과 달리 황약사는 곽정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구양봉의 조카와 사돈을 맺고 싶어 했지만, 결국 마지못해 딸이 사랑하는 곽정을 사위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후속작 《신조협려》(영웅문 2부)에서는 딸 부부와 함께 사는 게 갑갑하여 도화도를 나와 강호를 떠돈다.
같은 소설을 오랜 시간 간격을 두고 다시 읽다 보면 과거에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 만나는 즐거움과 함께 예전과 달라진 관점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신조협려》를 읽으면서 20년 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황약사의 쓸쓸함이다. 그는 강호 최강의 고수이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자연인들과 많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그는 강호를 떠도는 일도 그만 두고, 각자 기구한 사연을 지닌 두 여제자와 느지막이 인연을 맺고 함께 은거해서 소박하게 살아간다. 타인에게 구애받지 않는 삶은 자유롭지만 적막하기도 하다.
무협소설은 롤플레잉 게임처럼 무공의 성장과 강한 적들과의 대결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고 그것은 가장 많이 읽힌 무협 작가라고 할 수 있는 김용의 소설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 못지 않게 “정(情)”이라는 감정과 그로 인한 고통이 중요한 주제가 된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강한 무공을 지닌 고수들도 남녀 간의 정에 관한 문제는 풀지 못한다. 이런 주제는 영화 《동사서독》에서도 이어진다.
《신조협려》에서 각자 혼자서 강호를 떠돌아 다니던 홍칠공과 구양봉은 화산의 눈덮힌 기슭에서 우연히 만나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신조협려》의 주인공인 양과도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대결을 펼치다 기력을 소진해 움직일 수도 없게 된 두 고수는 양과를 통해 말로 초식을 주고 받는다. 홍칠공이 타구봉법의 마지막 초식을 펼치자 파해법을 찾지 못해 한참 고민하던 구양봉이 끝내 대응법을 만들어 보여 주자 홍칠공이 감탄하고, 두 사람은 함께 웃다가 최후를 맞이한다.
《신조협려》의 마지막 장면에서 황약사, 곽정, 황용, 양과 등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화산으로 함께 떠난다. 홍칠공의 무덤에는 모두가 함께 절을 올리지만, 구양봉의 무덤에는 양아들인 양과와 그의 짝인 소용녀만 절을 올린다. 그 후에 사람들은 천하오절을 새롭게 구성해 보자는 이야기를 재미 삼아 나눈다.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중신통 중 동사는 그대로이지만, 남제 단지흥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니 남승으로 바뀌고, 북개와 서독의 자리는 영웅문 1부와 2부의 주인공인 북협 곽정과 서광(서쪽의 미친 사람) 양과가,물려 받는다. 중신통의 자리를 받은 노완동(늙은 개구장이) 주백통까지 포함해서 이제 새로운 천하오절은 동사 서광 북협 남승 중완동으로 정리된다.
이런 이야기들을 마치고 화산을 함께 유람한 다음 사람들은 헤어진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양과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한다.
“우리도 이만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반가웠습니다. 언젠가 강호에서 서로 만나면 술 한잔 하며 쌓인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후속작은 원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한《의천도룡기》(영웅문 3부)로 이어지는데, 2부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어린 소년 장군봉이 100세 나이의 무당파 장문인으로 재등장할 뿐 다른 주인공들은 이미 전설이 되어 있다. 곽정과 황용은 몽고의 침공을 막는 와중에 숨졌고 양과와 소용녀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굴에 은거한 후 소식이 묘연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동사 황약사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