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열두 방향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삶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스피노자는 네덜란드의 유태인 사회에서 그 학식과 재능으로 촉망받는 젊은이였으나 신을 부정하는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파문을 당한다. 렌즈를 깎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철학을 연구하며 하숙집에서 독신으로 평생을 지내다 폐질환으로 인해 4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수도자와 같은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은둔 생활만 한 것은 아니고, 나름 당대의 유명 인사였다. 친구들과 더불어 그의 사상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도 여럿이었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편지를 통해 철학적 문답을 나누기도 하고, 네덜란드를 침공한 프랑스 군의 장군에게 손님으로 초대를 받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 자리에 초빙을 받기도 했다. (교수 자리는 자신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생활이 방해 받을 우려를 온건하게 내비치면서 사양했다.)
다만 그의 유명세의 상당 부분은 악평으로 인한 것이었다. 스피노자를 파문한 문서에 실린 악담은 꽤 유명한데, "그는 낮에도 저주받고 밤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잠잘 때도 저주받고 일어날 때도 저주받을 것이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그를 덮쳐 그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이다.”라는 식이다.
이런 분노와 적의는 당대와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었다. 스피노자의 온유한 성품과 소박한 삶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나, 이런 반감의 상당 부분은 그가 무신론을 옹호한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흔히 범신론으로 소개되곤 한다. 그의 명제 중 하나가 신이 곧 세계 전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은 무한하고 그 바깥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실체이다. 그렇다면 곧 신은 세계 전체와 동의어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세상의 모든 것은 신 안에 포함된 것이다. 이는 사물마다 영혼이 있다는 식의 애니미즘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사람들이 범신론에서 연상하는 것보다는 무신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런 결론으로 이끄는 방식은 수학이나 동어반복에 가깝다. 스피노자의 신은 세상 바깥에 있는 존재도 아니고 그 안에 있는 부분적 존재도 아니다. 스피노자의 정의 상 신은 무한한 실체이기 때문에 세상 안에 있는 인간이나 사물들을 대상으로 인식하고 능력을 행사하는 인격적 신이 될 수 없다. 자기 바깥에 대상을 갖는 존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한한 실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세계나 세상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스피노자의 사상은 17세기 근대의 문턱에서 전통적인 종교를 부정하는 무신론의 하나라고 보면 족하지 않을까? 당시로서는 논쟁적인 주제였고 선구적인 생각이었겠지만 현대에도 그럴까?
하지만 스피노자가 펼쳐 보이는 세계관은 일반적인 무신론이 그리는 그림과 다른 인상을 준다. 논리 상의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를 찾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스피노자의 사상은 독특한 이미지들을 창조하여 우리 마음 안에 자리를 잡게 해 준다.
신=세계는 무한하고 유일한 실체이다. 그것은 무한하고 완전하며 신성하고 풍요롭고 영원한 전체이다. 반면 우리 인간을 비롯한 세상 안의 모든 사물들은 신의 변용(變容)이다. 변용이라는 단어가 좀 어려운데, 내가 이해하는 의미로는 형태가 변화하는 것, 즉 변화하지 않는 무한하고 영원한 신의 본질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유한한 대상들로 표현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내가 분노라는 감정을 안에 품고 있으면 얼굴 표정이나 말투나 몸짓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이 된다. TV는 켜지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고 여러 다른 채널을 바꾸어 가며 볼 수도 한다. 레고 조각은 여러 방식으로 결합되어 집이나 성이 되기도 하고 소방차와 우주선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본질적 질서 안에 잠재된 가능성들이 구체적인 어떤 형태와 방식으로 구현되는 것, 이것을 나는 변용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 만물이 무한하고 영원한 신=세계의 변용이라는 개념이 이해가 된다. 우리는 신의 안에서 신의 역량과 속성들의 표현으로서 존재하며, 무한에 속해 있지만 유한한 존재로서 전개되고 변화하고 다른 존재로 바뀌어 간다. 이런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의 동어반복적인 개념이지만 어떤 이미지들을 떠오르게 하며 그 이미지들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세계라는 강 속을 흘러가는 작은 물방울, 도라고 하는 무한한 흐름 속의 작은 일부분로서의 우리라고 하는 이미지이다. 이런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무한의 일부분이라고 하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선택하고 추구하는 주체이기 이전에 신의 무한한 본질을 구성하는 법칙에 따라 전개되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떠밀림을 당하는 객체인 동시에 우리 내부에 신의 속성들을 갖고 있으며 그 속성들을 전개해 나가는 주체이기도 하다.
필연을 따르되, 그 필연은 외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전개라는 점에 스피노자 사상의 한 특징이 있을 것이다. 주체가 된다는 것을 선택, 의지, 판단 등 정신적 활동이자 자유의지의 발현으로 이해하는 생각들과 달리 스피노자는 몸과 마음이 결합된 나라는 존재의 본성과 필연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필연은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외부의 구속이 아니라, 자신의 잠재된 본성을 세상에 전개해 내는 주체의 힘을 포함하는 개념이 된다.
스피노자의 사상을 형이상학적으로 엄밀하게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전문 서적을 보면 철학자들도 어려워 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논의에서 더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 핵심적이라고 생각되는 시사점들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은 논리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진리를 알려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 안에 이미 갖고 있던 생각의 씨앗들, 우리가 이미 동의하는 믿음의 함의들을 전개시키고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명료하고 인상적인 문장의 힘이기도 하고, 우리가 그로부터 연상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의 힘이기도 하다. 그런 명제와 이미지들이 어울려 우리 마음에 지속적 영향을 미치는 직관을 재구성한다.
스피노자의 삶과 그의 철학은 어울린다. 온유하면서 주체적인, 독립적이지만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필연에 따르지만 능동적인, 세상의 신성함을 믿는 무신론자의 이미지.
스피노자가 지향한 것은 이성을 통해 자신의 본성과 세계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에 기반해 최선의 길을 따르는 삶이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과 지식은 한계가 있고 우리는 충분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선택을 내려야 한다. 이것이 풀리지 않는 난제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성을 발휘해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는 주체인 동시의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들을 안에 품고 그에 따라 움직여지는 객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에는 여러 장점이 있다. 그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 대한 정보와 지식에 더 관심을 갖게 하며, 책임을 회피하지 않지만 지나치게 자책하거나 불만을 갖지도 않게 되는 데 도움이 된다.
신 안에서 존재들은 평등하다. 우리에겐 다른 존재들보다 행복할 권리가 없다. 사막에서 오랜 가뭄을 버티는 선인장, 다음 세대를 위해 먹이를 준비해 두는 벌과 그 독침에 마비되어 느린 죽음을 기다리는 바퀴벌레, 사랑에 빠져 상대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젊은이들, 세계의 지배자들,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는 노숙인. 이들은 모두 평등하다. 신의 한 부분으로서 각자의 필연을 따르는 존재라는 점에서 평등하다. 우리는 필연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전개되어 나가면 된다. 그 필연이란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법칙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본성, 욕구, 희망, 믿음, 생각들을 아우른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존재들과의 우연한 만남들을 통해 상호작용하면서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 안에 깃든 신의 표현이다. 그리고 세계는 신성한 것이며 우리가 겸손함과 경탄을 갖고 대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스피노자의 가장 유명한 명언은 아마 “지구가 내일 멸망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정작 스피노자가 한 말이라는 근거가 없지만 왠지 스피노자주의에 어울리는 말처럼 들린다.
스피노자주의자라 하더라도 굳이 지구 멸망 전날 사과나무를 심는 대신 할 만한 다른 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 말은 상기시켜 준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산다는 믿음은 무신론의 입장에서는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우리의 삶이 반드시 목적에 이끌려야만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만약 멸망을 앞둔 지구의 마지막 날 내가 할 일이 사과를 심는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의 욕구, 정서, 믿음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면, 사과를 심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필연이자 숙명이다. 그 선택은 그 행위가 사과 열매를 얻기 위해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큰 만족감과 행복을 주기 때문인 것만도 아니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마음, 욕구, 장기적 목적, 올바른 행위에 대한 믿음, 타인에 대한 책임감 등 우리를 이끄는 동력은 다양하다. 우리의 동기는 이 중 어느 하나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이 모든 것을 감싸안으면서 숙명에 가장 가까운 어떤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숙명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여전히 풀기 어려운 딜레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필연이 합치되는 상태를 꿈꾸고 지향할 수 있다.
끝으로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 ‘프루스트와 베타’에 인용되고 어슐라 르 귄의 단편집 제목으로 쓰이기도 한 A.E.하우스만의 시 ‘슈롭셔의 젊은이’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내 생각에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훌륭한 이미지로 표현해 주는 시이다.
From far, from eve and morning
And yon twelve-winded sky,
The stuff of life to knit me
Blew hither: here am I.
Speak now, and I will answer;
How shall I help you, say;
Ere to the wind’s twelve quarters
I take my endless way.
멀리로부터, 밤과 아침으로부터,
열두 바람이 부는 하늘로부터,
생명의 재료들이 나를 엮어내며
이곳으로 불어왔네. 여기에 내가 있네.
이제 말하라, 그러면 내가 대답하리라.
내가 당신을 어떻게 도울지, 말하라.
바람의 열두 방향으로
나의 끝없는 길을 떠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