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이란 무엇인가?

숙명과 운명은 어떻게 다른가?

by 황인석

먼저 운명이라는 단어부터 시작해 보자. 운명은 숙명보다 더 자주 쓰이는 단어이고 그 뜻도 명확한 편이다.

운명에 의한 만남, 운명적인 사랑, 그가 따라야 했던 운명.. 운명은 자신의 의지나 계획과 무관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신이 어떤 사람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정해두었다는 믿음일 수도 있지만, 꼭 그런 초월적 존재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 아니더라도 이미 사전에 결정된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 결정론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운명을 믿을까? 사람마다 다르고 경우마다 다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사주를 보면서 자신의 정해진 운명을 미리 알고자 하고, 어떤 사람은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행 계획을 세우거나 음식 메뉴를 선택할 때는 자신이 어디 갈지, 뭘 먹을지가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현재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주어진 운명이라고 체념하기도 한다.

운명의 힘은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에 대한 판단은 경우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 자신이 쌓아 온 과거 경력, 사람들이 보통 받아들이는 상식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은 우리의 선택에 제한을 가하고 그 폭을 좁힌다. 그러한 폭이 좁을수록 운명의 힘에 강하게 종속된 것처럼 느낀다. 또한 갑작스러운 질병과 사고처럼 자신의 뜻과 무관하고 예측할 수 없게 일어나는 일들도 운명의 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운명의 힘이 충분히 강하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우리에게는 운명에 따르는 것 외에 다른 의무나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지가 어떤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선택의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에서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우리의 운명을 잘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적응하느냐의 문제만 남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남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운명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운명에 대해 충분히 모른다는 것, 그리고 운명의 힘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힘의 방향이나 영향력에 대해 충분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숙명이라는 단어는 운명과 거의 비슷한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운명은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숙명은 그러한 여지조차 없는 고정된 운명이라는 설명도 있다. 운명을 극복한다는 표현이 있는가 하면, 숙명은 더 엄숙하고 진지한 느낌을 주는 것을 보면 일리가 있는 설명인 것 같다.

그렇지만, 철학적인 의미에서 운명은 주로 주체 외부의 객관적 조건에 관련된 것인 반면 숙명은 주체의 본성이나 의지 같은 내부적 요소까지 포함한 필연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숙명은 자신이 갖고 있는 성격과 적성, 재능과 역량, 의지와 욕구 같은 주체적 요소까지 포함한 운명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숙명은 발견하고 찾아가야 할 대상으로서 더 어울린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의 약속이 갑작스런 복통 같은 돌발 상황 때문에 깨지고 그로 인해 그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졌다면, 그것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어렸을 때 우연히 보게 된 과학 다큐멘터리가 너무 재미있어서 과학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노력을 하다가 과학자는 아니지만 이공계를 전공한 엔지니어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지칭하기에 운명보다 숙명이라는 단어가 적절해 보인다.

이런 단어의 의미 차이에 대해서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고 정답이 있는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방식의 개념 구분을 요약하자면, 운명은 주체의 외부에 있는 조건들만 포함되는 필연이고, 숙명은 주체 내부의 요소까지 포함하는 필연이다.


스피노자가 필연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자유라고 말했을 때의 필연이란 물론 운명이 아닌 숙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을 따르고자 하는 삶의 태도는 운명에 대한 순응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가 스스로를 포함한 필연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가? 내가 A가 아닌 B를 선택하는 것이 필연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그 순간, 나는 B가 아닌 A를 선택하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을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다시 앞에서 다루었던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역설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자유의지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려는 동기나 변덕스러운 충동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성적으로 적합하게 판단되는 대안을 버리고 부적절한 대안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온전히 숙명으로서의 필연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 필연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숙명으로서의 필연이란, 우리가 스스로의 본성을 포함한 모든 인과관계를 적절하게 인식할 경우 내리게 될 선택들에 의해 펼쳐지는 필연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상적인 자유란 자신의 숙명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에 따르는 삶의 길을 의심 없이 걸어가는 사람의 자유다.


하지만 물론 우리는 전지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필연을 인식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스스로의 숙명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갈등과 불안과 혼란과 두려움을 느낀다.

숙명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자신의 숙명에 따라 살 수 있는가?

더 생각해 볼 부분이 많지만, 일단 여기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정도 수준의 답을 하고자 한다. 우리는 자신의 숙명을 완전히 알 수 없지만 완전히 아는 상태와 전혀 모르는 상태 사이엔 다양한 상태들이 존재하며, 우리는 완벽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더 나은 앎을 지향할 수 있다.


숙명의 개념은 유연하고 유용하다. 그것은 운명의 힘을 경시하지 않으면서 운명의 힘이 의지와 계획 등에 의해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또한 나의 모든 특성들은 외부 세계의 법칙들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나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지만, 장기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임을 알려 준다. 의지가 바꿀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의지가 내 경험을 바꾸고 그 경험이 내 존재를 바꿀 수 있음을 알려 준다. 외부의 법칙과 우리 자신의 법칙들에 대한 지식은 중요한 도움을 주지만, 우리는 충분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선택해야 하는 처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또한 우리는 지식과 사고의 기반 위에 판단해야 하지만 지식과 사고의 역량 모두 부족한 처지에서 직관과 우연에도 함께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불완전한 선택들로 우리의 필연이 만들어져 나간다는 것을 알려 준다.

우리는 책임을 갖는 주체인 동시에 그 주체에게 주어진 대상이다. 우리의 삶은 숙명을 발견하는 동시에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불완전한 자유를 누린다.

이런 생각들은 굳이 숙명의 개념을 파고들어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생각들이지만, 숙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많은 생각들을 압축적으로 환기시키고 사고의 흐름에 쉽고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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