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를 할 때면 가끔 생각이, 깊은 물에 빠지기도 하고, 높은 하늘을 날기도 하며, 전생을 날아다니기도 하고, 다음 생으로 타임머신 가기도 한다. 오랜만에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어 오늘도 하늘을 중간정도 날아오르려는 순간, 휴대폰메시지가 휘파람을 휘리릭 불어오는 탓에 다시 곤두박질하여 현실이라는 지구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작은 아이의 담임선생님의 문자 메시지였다. 학부모 연수체험활동의 장소와 시간을 보내주시면서 오후 2시까지 청소년센터 온 2층 꿈 채움 교실에 오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항상 약속시간보다 먼저 일찍 나가는 습관에서인지 옷을 미리 챙겨 입고 가방에 책과 필기구를 챙기고 길을 나섰다.
아직도 1시간 정도 남았지만 미리 도착해서 장소도 둘러볼 겸, 지금이야말로 혼자만의 작은 여행이자 바깥의 풍경을 눈에 담는 시간이기도 한 나만의 여유로운 힐링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오히려 이 시간이야말로 내 앞에 주어진 자유의 선물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아담한 주차장의 그늘 밑에 주차를 하고 센터를 향했다. 화단의 알록달록한 꽃들은 너도나도 앞 다투어 피었고 5월의 햇빛은 너무나 따사로웠다. 간판을 따라 들어가 교실근처에 도착하자 안내하시는 분, 한분이 계셨다. 서성거리는 나를 보시더니 아직은 너무 이른 시간이라 여기엔 아무도 없다고 했다.
‘오잉? 그럼 난 뭐 아무도 아닌가? 그러시는 안내자 선생님이야말로 아무도 아니지 않나?’
할 수없이 다시 몸을 돌려 바깥에 나왔다.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은 터라, 터벅터벅 걸어서 나의 하얗고 작은 아담한 집으로 향했다. 그게 뭐냐면 몸집이 작은 나의 자동차다. 헤헵. 외출 했을 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갈 곳이 없는 내게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집, 때론 시간을 절약해주기 위해 발이 되어 어디든지 함께 달리는 나의 작은 집. 전에 회사에 다니던 관리자분이
“수란씨, 바꿔. 이것도 차라고 타고 다녀?” 라며 핀잔을 주던 조그마한 그 집. 작은 그 집은, 오늘도 서성이는 나에게 어서 와 타라고 손짓하였다.
그 집에 들어가면 뒷좌석에 몸을 기대여 차창 밖으로 저 하늘에 걸려있는 하얀 구름을 올려다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나처럼 몸집이 작은 천사 같은 하얀 집안에서 나는 잠시나마 몽상에 빠지기도 한다.
파란색배경으로 된 저 하늘 너머 건너편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올려다보면서 저기 저 먼 곳에는 어떤 것이 살고 있을까? 정말 외계인이 존재 하는 걸까?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상상하기도 하고 떠오르는 생각과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종이위에 그려내고 담아내기도 하였다. 그 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오늘 이렇게 내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갈 줄이야.
어릴 때부터 많이 외롭고 고독을 무서워하던 내가 독서의 사색으로부터 이 모든 것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때론 어두운 생각 속에서 걸어 나와 마음속에서 자그마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조금씩 삶을 바꿔가면서 내 자신도 달라졌음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을 감사하면서 살고 있었다. 지금처럼.
저 멀리서부터 학부모님과 선생님이 보이자 나는 그제야, 긴 한숨을 내 쉬고 교실을 향했다. 맨 처음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이어서, 자기소개와 함께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의자에 앉았다. 각자의 자리에는 며칠 전에 보낸 우리의 인물 사진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우리는 그 위에 자신의 얼굴과 배경에 색칠을 하는 거였다.
현장에서 배워준 그대로 꼼꼼히 색칠해나가다가 붉은 갈색인 머리부터 칠하는 데 갑자기 빨강머리 앤이 떠올랐다. ‘나도 저 아이처럼 만약 안 좋은 상황에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행복한 상상을 할 수 있을까?’
대답은 ‘노’였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 나는 감정컨트롤이 잘 되지 않는 한 사람 이였기 때문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긍정보다 부정을, 밝음보다 어둠을, 자신감보다 낮은 자존감을 안고 살아온 아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고개를 흔들고 다시 그림에 집중하였다. 이젠 낡은 기억에서 빠져나오기로 결심하면서.
그렇게 머리를 다 그리고 나서 옷을 그리려는 데 순간 마음이 짠해났다. 그 동안 몸에 맞는 옷이면 아무거나 입었고, 다른 사람들이 준 옷이 내 몸에 끼워 맞춰지면 감사하게 받아 입었다. 지금 사진 속의 옷도 다른 사람한테서 물려 입은 거였다. 평일엔 항상 아이들을 먼저 챙기고, 고생하는 남편에게 보약을 사주고, 불균형한 수입에,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남은 돈을 조금이라도 저축하고 나면 내 삶속에는 ‘나’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런 삶이 최선이었고 그게 가족을 위하는 마음이었고, 나의 조그마한 사랑이고 행복이고 삶이였다.
하지만 오늘 그림 속의 나를 천천히 그려가면서 그 동안 고생해온 내 모습을 보고 마음이 저려왔다. 한 올의 머리카락을 그릴 때마다 그 동안 고생해온 나에게 한 오리씩 섬세하게 그려 넣었다. 검은 눈동자에도 하얀 빛을 그렸고 조그마한 입술에 윤기를 내면서 조금이라도 더욱 멋부려보았다. 그렇게 반평생을 고생 속에서 울고 웃으며 오늘까지 꿋꿋하게 잘 버텨온 내 모습을 보고 갑자기 주체 없이 눈물이 벅차올랐다. 이 모습도 언젠가는 변하겠고 세월이, 지나간 흔적을 얼굴곳곳에 남겨놓을 것이다.
지금의 모습을 기억 속에 잘 간직하기 위하여 나는 미래의 내일에서 돌아보게 될 오늘의 나를 그리워하면서 하나하나씩 세세하게 그려나갔다. 그렇게 그림 속의 한 여자를 들여다보면서 ‘이게 나구나.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기도 하고 ‘그 동안 고생 많이 했다. 조수란 힘내.’ 라고 파이팅을 외쳤다. 그렇게 옆 사람 몰래 나 혼자 슬퍼하고, 나 혼자 안아주고, 나 혼자 응원하고, 나 혼자 칭찬하면서, 맘속으로 나 혼자 가만히 흐뭇해하기도 하였다.
오뚝한 코, 얄따란 속 쌍거풀, 조그마한 입술. 쩝. 이 정도면 뭐 나쁘진 않은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생의 고단함 속에서, 힘든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몰랐고 사는 대로 살아온 나였다. 뒤늦게 삶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몰라왔던 많은 것들 속에서 방황하고 길을 잃고 헤맨 자신을 조금씩 알아가고 찾아가면서 발견하는 중 이다. 또 그렇게 매일 감사하고 감사함 속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매 순간, 매일을 살아가고 있기도 한다. 오늘은 나를 그리면서, 그리워하는 순간이 어쩌면 그 동안 무심하게 지내왔던 자신을 돌아보고, 나와 친해지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길은 책속에 있다’는 말이 있듯이, 그 동안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발견하고, 또 그렇게 이해하고, 안아주면서 내 삶의 주인이 되어 가는 길을 선택하여 그렇게 오늘의 삶을 만들어가면서 조금씩 완성해가고 있다. 헤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