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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 정도의 삶

by 조수란

남들은 아침시간을 이용해 하루의 감사 일기나 아침명상 혹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독서하고 글을 쓰는 아침 형 인간의 삶을 선택하여 살아가고 있다. 아침시간 활용법을 이용해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의 시작과 충전을 준비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때문에 앞으로 내게 남은 짧은 인생을 조금이라도 늘려보기 위해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려고 하였다. 단30분만이라도 독서나 글을 쓰고 싶었는데 쉽지가 않다. 인생이란 삶을 고무줄처럼 내 생각대로 함부로 늘리고 줄이고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습관과 생각과 행동을 바꿔야했다. 여기에는 노력과 결심이라는 양념이 필요하고 조금씩이라는 미세한 변화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안개처럼 뿌연 기억 속에 내일아침을 그려 넣었다. 지금부터 내 기억장치에서 낡은 습관들을 조금씩 떼어내고 새로 도배하려고 준비 중이다. 지금 뇌 속의 혈관에 들어붙은 생각찌꺼기들을 조금씩 청소하고 기억 속에 있는 낡은 패턴을 새로 공사 중이다.


처음엔 몇 번을 시도해보았지만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나는 역시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를 이기는 힘은 다른 곳에 존재했다. 그건 매일 아침 울리는 5시 30분이라는 알람소리 때문이다. 알람소리가 혈관 속을 파고들면서 온 집안의 공기를 뚫고 울려 퍼질 때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달콤한 잠에서 깨여날까 두려움부터 앞서 벌떡 일어나 알람을 꺼버리곤 한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잘 자고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학교에 등교하길 바라면서.


코로나 시국에 두 아이의 건강을 챙겨주기 위해 무거운 잠을 뿌리치며 주방을 기어가더라도 아침밥은 꼭 챙겨 먹어 보내야 한다는 고집이 들어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건 어머니의 사랑이 아닌가. 내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내 몸이 낳은 또 다른 몸들을 챙겨야 하는 책임과 의무에서였다.


가끔은 남편이 농담 아닌 농담으로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을 보고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네 엄마와 같은 여자는 절대 사양하라고 조언을 해준다. 저런 것도 아이한테 교육이라고 하는 가 싶다가도, 어쩌면 일리가 있는 말에 무심하게도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내가 어느새 머리를 끄덕이면서 동의를 표시해주고 있었다.


생각의 회전이 빠르지 못한 나는 아빠와 아들의 키득키득 웃는 소리에 뒤늦게 깨닫는다.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나는 나중에 작은 딸이 어른이 되면 아빠 같은 남자를 절대 만나서는 안 된다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가로막겠다고 한다. 남편이 내 뱉은 말에 후회라는 약을 뿌려주기로 하면서. 이게 B형 원숭이 띠인 나의 소심한 복수이다.


“다윤아, 나중에 커서 아빠와 같은 사람을 절대 만나지마. 알았지?”


작은 딸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엄마, 왜? 난 아빠 같은 사람이 좋은데. 난 아빠랑 결혼할거야.”


“헐, 대박.”


큰 아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아직은 세상모르는 아이의 말에 나는 멋쩍게 웃는다.


“그래, 오늘은 내가졌다.”


남편이 제일 싫어하는 복수가 하나 있다. 그게 뭐냐면, 연애시절 때 남편이 내 전화를 한번 받지 않으면 그다음 날 나는 두 번을 받지 않았고 두 번을 안 받으면 4번을 받지 않았다. 그 후, 결혼을 한 다음 집에 하루를 들어오지 않으면 나는 이틀을 가출했고 이틀을 들어오지 않으면 나흘을 가출했다. 그 후부터 남편은 무조건 받았고 무조건 들어왔다. 지금은 조금 익숙해진 일상에 나 혼자 아이를 밥 해먹이고 씻기고 학교에 보낸다. 물론 사춘기에 들어선 첫째는 뭐든지 자기절로 할 수 있어서 편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집과 회사의 거리가 조금 멀리 떨어진 탓에 남편은 어쩔 수 없이 기숙사생활을 선택했다. 그렇게 우리는 주말부부가 되었다.


우스꽝스럽게도 그런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도 나와 비슷한 사춘기 나이 때인 아들이 있다. 우리는 시간이 나면 사춘기아들들의 뒤 담화에 열을 올렸고, 혹시나 해결하지 못한 문제나 고민을 서로 털어놓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고 그 친구는 매일 보는 남편의 얼굴이 지겨울 때가 있는데다가 한 번씩 싸울 때면 언성을 높여야 직성이 풀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혹시 갱년기가 온 게 아닌 가 의심하기도 했단다. 그러면 내가, 우리는 이미 사춘기가 지났으니 오 춘기가 온 게 아닐까 싶다고 했다. 그러자 전화기너머로 푸하하하 한바탕 웃는 소동이 일어나면서 저 건너 여름바다에서부터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중년기 아줌마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내 귀에 전달된다.


친구는 남편이랑 싸우면 꼴도 보기 싫은데 주말부부인 우리는 서로 떨어져 사니까 얼마나 좋겠냐고 하면서 부러움을 표시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그녀를 더 부러워한다. 왜냐하면 우리부부는 주말에 싸우고 나면 그다음 주말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이라도 봐야 화해할 텐데 속 좁게도 일주일동안 마음상자 속에 화나 분노를 잔뜩 넣고 있자니 마음이 무겁고 속에서 열불이 끓고 있을 때가 많다고 하였다. 차라리 그 친구처럼 있는 자리에서 화내고 마음을 털어놓는 게 훨씬 이득이라고 생각하였다.


어쨌든 우리들의 중년의 삶은 냄비 속에서 펄펄 끓는 된장찌개와도 같을지도 모른다. 살짝 끓이면 맛없고 너무 익으면 양이 줄어들면서 짜지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희망이라는 냄비를 잡고 옆에 서서 가스의 불을 잘 조절해주고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남편들이여, 그대들은, 그저 관심을 조금만 기울이고 지켜봐주기만 한다면 편안하고 맛있는 한 끼의 식사와 행복한 순간을 즐겁게 보내게 될 터이다. 그러면 행복은 먼 곳 아닌 가까운 곳에, 우리의 눈앞에 있음을 곧 알게 될 것이다.


행복이란 정의를 내리면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의 이 정도의 소소한 삶에 만족한다. 남들처럼 부자가 아니더라도, 타고난 재능이 없어도, 명예나 지위가 영순위라도, 가족과 함께 티격태격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 행복하고 즐겁다. 그저 모든 사람들이 건강한 삶에 감사하고 이 순간을 알아차리면서 이 정도의 삶에 귀를 기울이면 아름답게 살아가는 인생이 되지 아닐까 싶다. 우리의 삶은 모두 아름답다. 그러니까 애쓰지 않고 가볍게 살아가는 게 나를 위한,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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