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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혼자 있으면 깨닫게 되는 것들

by 조수란

몸이 어지러우면 물로 깨끗이 씻어버리면 되지만 정신이 어지러울 땐 지구의 감옥보다 내 마음의 감옥을 먼저 탈출하는 게 우선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낸, 나를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전화기를 꺼놓고 하루도 아닌 반나절만 집을 나서기로 한 것이다. 사람이 누구나 하루정도는 외출하지 않은가.


잠시만이라도 세상의 소리와 분리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 육체를 이끌고 여기 저기 가고 싶은 곳을 돌아다니다가 조그마한 강 옆에 앉아서 졸졸 흐르는 강물에 기대어 멍 때려 보기도 하였다. 깨끗하고 투명한 물속에는 아름다운 물고기가 살고 있었고 강 옆에는 이름 모를 잡초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높은 하늘에서만 날아서 자유로운 게 아님을 알았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물속의 물고기들도 여유롭게 흐느적거리며 헤엄을 치고 있는 모습도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고백할 게 하나 있는데, 사실 나는 물고기 중에서 제일 미운 게 구피이다. 처음에 모르고 집에서 1년 정도 열심히 키웠는데 어느 날, 암컷구피가 귀엽고 예쁜 새끼들을 낳았다. 제일 처음으로 발견한 이 기쁨을 아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집안에서 소리높이 외쳤다.


“얘들아, 엄마구피가 아기구피를 낳았어.”


작은 아이가 너무 신기해하면서 폴짝폴짝 뛰어왔다.


“엄마, 어디 어디?”


어항 속을 아무리 찾아봐다 방금 전에 보았던 아기구피가 없었다.


“어? 신기하네, 금방까지 아기구피가 있었는데.”


이때 엄마구피뱃속에서 아기구피 또 한 마리가 나왔다.


“어, 봤지? 너무 귀엽다.”


그런데 이때 갓 태어난 아기구피를 보면서 감탄하던 중에 어미구피가 자신이 낳은 새끼를 우리가 보는 눈앞에서 잡아먹었다. 우리는 두 눈을 비비고 가시면서 다시 봤지만 역시나 아기구피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설마 아까 처음에 발견했던 새끼도?’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믿기지 않는 상황에 나는 그저 멍하니 쳐다보다가 다음에 또 나올지 모르는 새끼의 구원에 나섰다. 큰 구피들을 다른 물통에 옮기고 어미혼자만 남겨놓았다. 그리고 새끼가 나올 때마다 재빨리 어미와 아기구피를 갈라놓아야 했다. 무지한 산모를 잘 못 만난 처음의 두 아기구피들은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가고 말았다.


‘구피야, 미안해. 다음 생엔 사람으로 태어나 엄마한테 잡아먹히는 것이 아닌, 엄마한테 실컷 사랑받으면서 자라는 아이로 태어나길 바래.’


충격적인 장면에 화가 잔뜩 난 나는 아는 언니한테 전화해 구피를 넘겨주었다. 구피가 양심도 없는 엄마라고 생각하니, 아니 엄마의 자격도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성껏 돌보고 싶지 않았다.

이미 구피 생각만 해도 화가 잔뜩 난 나를 보던 큰아이가 한마디 하였다.


“엄마, 생각해봐 구피가 우리의 손톱보다도 더 작은 데, 쟤가 뇌가 있겠어? 있다고 쳐도 저렇게 조그마한 뇌에서 무슨 새끼를 보호할 생각이나 하겠어? 어쩌면 영혼이 쬐꼼 만큼 작으니 구피로밖에 태어난 게 아닐까?”


이 말을 듣고 있던 작은 아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맞아 맞아. 영혼이 작은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어. 그러면 다음 생에도 자신의 영혼의 크기만큼 한 동물들이나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했어. 영혼이 작으면 모기라도 태어날 수도 있는데. 그리고 돼지나 소나 닭으로도. 아, 그런데 동물들이 너무 불쌍해. 하지만 나는 소고기와 치킨이 너무 맛있는데...”


맞장구를 치던 작은 딸이 조그맣게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참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럴 듯한 설득이다. 그때 영혼이 작을수록, 작은 동물로 태어난다고 언젠가 말을 한 적이 있는데도. 정작 상황에 부딪치고 나니 엄마구피의 미운마음부터 들었다. 두 아이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영혼이 이만큼밖에 되지 않는 나도 아직까지 배울 것이 차고 넘치는 사람인데, 하필 쬐꼼한 구피보고 엄마노릇을 못한다고 버럭버럭 성을 내는 나도, 엄마노릇을 참 지질이 못한다.


덩치만 컸지, 오늘까지도 나는 아이들에게서 배우고 또 배운다. 이럴 때보면 지구의 감옥도 우리 집 감옥도 뭐, 나쁘진 않다. 탈출하고 싶다가도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게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 이런 게 삶이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고 희로애락을 즐기면서 사는 게 어쩌면 내 인생일수도 있겠다. 그건 그렇고 반나절만 휴대폰을 끄고 집을 가출했을 뿐인데 집에 와보니 수십 통의 부재중전화와 몇 백 개의 읽지 않은 그룹메시지가 있었다. 외국에 계시는 엄마는 정말 급한 일인데 내가 연락이 닿지 않자 일하는 남편한테로 전화를 해서 나를 찾았고 수십 통의 전화를 받지 않는 나를 보고 남편은 걱정을 많이 했다고 했다. 학교에서부터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연락을 왔고 회사에서는 일하러 나올 수 있냐고 하면서 전화를 안 받으니 문자를 남겼다고 한다.


이럴 때엔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를 해야 할지, 아름다운 감옥에 갇혀 사는 중이라고 고마워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릴 때 까지만 해도 우리 집엔 전화도 휴대폰도 없었다. 그때는 손 편지를 써서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였고 TV라는 바보상자가 없어도 라디오를 들으며 잘만 살아왔다. 하지만 똑똑한 사람들이 만든 휴대폰이 생기면서 한 편으로는 사람들을 편리하게 만들지만 자칫 잘못하면 중독에 빠트리기도 한다. 우리가 타는 자동차도 그렇다. 바쁜 업무에 부딪칠 때마다 자동차는 급한 시간을 단축해주고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지만 사고가 나면 목숨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것은 내게 존재하는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감옥이 있다면 아직까지는 나에게 있어서 가족이라는 감옥과 글 감옥인 것 같다. 가족이 있어서 울고 웃고 행복하고 한 편으로는 정신의 버팀목이 되어가기도 했다. 글감옥이 있어서 그 동안 숨어 있었던 내 생각과 존재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글로서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아마 마음속에서 아픈 가시가 되어 곪았을 터이다. 지구라는 감옥에서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딘가 도망 다니는 것보다 내 마음의 틀에 갇힌 생각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이 현명한 생각임을 느꼈다.


지구라는 감옥에 주인이 없다면 내가 손님으로 아닌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게 정답이지 않을까 싶다. 또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다. 나는 나니까. 날 수 있으니까.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삶의 주인이다. 그러니까 너무 애쓰지 않고, 손님으로 눈치 보지 않으면서 잘 보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나를 살리는 최선의 방법이다. 한번뿐인 인생을 내가 하고 싶은 걸, 원하는 걸 이루어가면서 매 순간을 즐기면서 사는 게 후회 없는 삶이고 나답게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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