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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남편은 언제나 내편

by 조수란

처음에 큰아이를 출산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집에 전기가 끊겨서 갓난아기를 안고 엉엉 서럽게 운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가셔지질 않는다. 텅 빈 집안에 슬며시 내려앉은 어둠속에 파묻혀 아기를 안고 두려움에 몸부림치던 그때, 남편은 괴롭다고 친구 집에 술 마시러 가고 맞은 켠 집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환한 불빛이 창문을 통과해 쏟아져 나와 어둠과 부딪치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촛불을 겨우 찾아 불을 붙이고 냄비에 물을 끓여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기분을 가라앉혔다. 아물거리는 불빛에 아기가 혹시나 무서워할까 걱정이 앞서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 온 남편이 친구네 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음식을 포장해왔다. 따뜻할 때 얼른 먹어 라며 수저를 갖다 주면서 미안함과 근심이 담긴 표정을 하더니 살며시 웃음을 지어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몹시 화나고 실망스러움이 잔뜩 묻어있던 기분이 안개처럼 사라지면서 그만 풋 하고 웃어버렸다. 우리부부는 비록 변변치 않은 살림에 결혼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고 힘들게 시작하였지만, 내가 선택한 결혼은 그저 서로를 배려해주고 따뜻하게 보듬어주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화목한 가정과는 멀리 자라온 나는, 이다음 커서 부자는 아니더라도 꼭 나를 예뻐해 주고 잘해주는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잘 살겠다고 다짐해온 터였다.


아이가 3살이 될 무렵, 남편은 울고 보채는 아이를 밥 한술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 욕조에 앉혀 물장난을 치며, 기분이 좋아질 때 기회를 봐가면서, 한술을 얼른 떠서 입안에 쏙 밀어 넣어주곤 하였다. 혹시라도 집안에 먼지가 날아다니면 구석구석을 방문 할 틈을 주지 않고 깨끗하게 닦아 놓았다. 어떨 때엔 남편보다 오빠처럼 더 다정했고, 문제의 해결에 나설 때면 아빠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가 어떤 것이 더 좋을지 함께 고민하고 함께 결정해 나갔다. 그런 남편을 만나 결핍했던 사랑을 채우는 것 같았고 부족했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그렇게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어릴 때, 언니가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외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녔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바쁜 농사일 때문에 항상 혼자 있어야 했다. 그야말로, 외롭게 자란 나는, 남편을 만난 후, 든든한 가족이 있음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잘한 것도 없는데 거기다 소중한 두 천사 같은 아이를 보내주신 하나님께도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이렇게 매일 감사함속에서 남편 아닌 내편을 만나서 더 바랄게 없이 행복한 매일을 살아가리라. 항상 주어진 모든 것에 만족하면서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위해 나 자신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키는 삶이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때론 낮은 자존감 때문에 기죽으면 남편은 언제나 곁에 있어주면서 함께 화내고 분노하고 한바탕 욕설을 내뱉으면서 든든한 내편이 되어주었다. 그래서일까 힘들 때나, 지칠 때 남편이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옆에만 있어줘도 위로가 되었고,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하면 서러움이 북받쳤다.


어느 새 두 아이가 커서 초등학교, 중학교가 되면서, 아빠에 대한 사랑과 책임은 변하지 않고, 그 사랑이 오히려 하루하루 더 진해져가는 것 같았다. 혹시 주말에 마트를 가거나, 저녁나들이를 갈 때, 무거운 짐이 있으면 당연히 남편의 몫인 것처럼 어깨에 둘러멨고, 그 네를 타기라도 하면 밀어주는 것도 당연히 아빠의 몫이었다. 혹시라도 친구들이 술 한 잔 하자고 전화가 걸려오면 바쁘다고 거절했고, 회사의 회식도 1차만 끝내고 곧장 집에 달려왔다. 사람들은 변화의 원인이 뭔지 궁금해 하였고,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였다. 그 원인의 중심은, 어쩌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고, 그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평생 넘게 살아오면서 가족과 함께하는 지금이, 아이들에게 쏟아 붓는 이 시간이, 항상 선물 같았을 것이고, 가장 행복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일까 싶다.


그런 남편이 있어서, 내가 어릴 때부터 몸에 배인 괴팍한 성격이 차츰 없어졌고 낮은 자존감과 우울함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세상이 달라보였다. 그렇게 마음한구석에서부터 믿음과 사랑과 희망이 샘물처럼 솟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런 남편이 아니었다면, 내 삶은, 내 세계는 그대로일 터였고 앞으로도 무엇을 위해 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잊은 채, 인생이란 긴 터널에 갇혀 보이지 않는 앞날을 허둥지둥 살았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이렇게 자유롭게, 하고 싶은 독서도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기도 하고 알바 일이 들어오면 조금씩 용돈을 벌면서 살아가는 것도 남편의 관심과 든든한 믿음과 적극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도 열심히 읽고 쓰기를 반복하면서 인생을 달린다. 이런 남편을 만난 내가, 뒤늦게 삶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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