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삶의 밧줄

by 조수란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둘째는 심심치 않게 악몽을 꾸었다. 집터가 문제일까? 아니면 잠자는 방향이 문제일까? 그래서, 집도 이사해보고 잠자리도 바꿔보았다. 초등학교에 올라오면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도 가끔씩은 무서운 꿈을 꾼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두려움에 떠는 아이를 안아주고 달래주고 어루만져주어도 소용이 없다. 아이는 그냥 슬프고 서럽게 울기만 했다. 다음날, 아이의 기분이 좋을 때면 농담처럼 말한다.


“다윤아, 엄마가 궁금한 게 있는데, 어제 왜 울었어?”


“무서운 꿈을 꿔서.”


“그러면 다음부터 엄마가 꿈속에 들어가 다윤이한테 매달리는 악당을 물리쳐줄게.”


“정말, 고마워, 엄마.”


이튿날, 또 운다.


“엄마, 무서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엄마가 없었어. 흑흑.”


“그래? 요즘 엄마도 꿈속에서 회사 일을 정신없이 하느라고 바쁘다보니 다윤이 꿈속에 못 들어갔네. 미안해.”


정말, 그랬다. 낮에 바쁘게 돌아가는 기계 앞에서 정신없이 일하다보니, 저녁에 꿈속에서까지 낮에 한 일을 연이어 하고 있었다. 낮과 밤에 죽도록 일한 탓일까? 이튿날, 아침이 되면 지친 나머지, 잠을 푹 자고 푹 일어났다기보다 24시간 일한 사람처럼 기운이 다 빠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런 아이를 잘 달래주기 위해 나는 입을 열었다.


“다윤아, 혹시 꿈에 무엇을 봤어?”


“귀신.”


“엥? 그러면, 귀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줄래? 엄마는 한 번도 보지 못해서.”


“기억 안나. 엄마.”


“그게 뭐야. 사실 이 세상에 귀신이란 게 없어. 그건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야. 꿈속에 말고도 우리는 현실에서 한 번도 귀신을 못 봤잖아. 없으니까 안보이지. 귀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야 꿈에 나타날 거 아니야. 다윤이 꿈에서 본건 귀신이 아니라 마음속에 두려움을 데리고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다윤이 한편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만 해도 이렇게 많은데 뭐가 무서워. 나쁜 사람이 있으면 경찰아저씨가 지켜주지, 학교에선 선생님이 지켜주지, 집에 오면 우리가족이 지켜주지. 안 그래?”


“그런가.”


“그럼. 다윤이 마음이 든든해지면 귀신도 무서워 도망갈 거야. 어쩌면 그 귀신이란 게 두려움일지도 몰라. 내가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용기 내어 맞서면, 저 멀리 사라질 거야. 그리고 두려움이 생긴다는 게 나쁘지만은 않단다. 사실 두려운 마음은, 나를 보호 하기위해 나타나는 거란다. 그럴 때마다, 두려움에게 감사하게 생각해보자. 두려움아, 안녕? 나를 보호해주기 위해, 찾아와 줘서 고마워. 라고 말이야.”


“응, 엄마, 다윤이가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갈게. 자연님, 감사합니다. 엄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빠 다윤이랑 놀아줘서 감사합니다. 아빠, 우리 가족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시느라 감사합니다.”


어떨 때에는 두려움이란 녀석이, 때와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찾아오고 제 맘대로 사라지기도 한다. 큰 아이는, 가끔 갑작스러운 자연재해가 두렵다고 한다. 몇 년 전, 지나가는 지진을 경험해 본적이 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 다고 하였다. 그때, 나와 남편은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아이 둘을 데리고 있는데, 갑자기 집이 흔들렸다고 했다. 아이들은 너무 놀라 땅바닥에 엎드렸고 깜짝 놀란 엄마가 창밖을 내다보니, 아우성치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고 했다.


커피를 들고 우는 사람, 자신이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집에 전화를 거는 사람,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3층인 우리 집에서, 1분1초 시급한 상황에 재빨리 탈출을 해야 되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엄마는 아이들을 바닥에 세워놓고, 갑자기 언니와, 이모와, 삼촌들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고 했다. 화면에 나타난 익숙한 얼굴에 안심을 하시듯, 이곳에 지진이 난 상황을 무슨 생방송을 하듯이 하소연 하셨다고 한다. 두려움에 떤 큰아이가 높은 소리로 외치며 이곳을 빨리 탈출해야 된다고 외할머니를 재촉하고 나서야, 커다란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고 했다. 다행이 다치거나 큰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공포의 밤이었을 터였다.


나도 예전에 두려움이 엄청 많은 사람이었다. 만약 홍수가 나면 아이들을 어쩌나, 운전하다 교통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나쁜 사람들이 내 아이를 유괴라도 하면 어쩌나, 연세 많으신 우리 엄마가 혼자 계시다가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라는 일어나지도 않은 쓸모없는 걱정이나 두려움을 달고 살았다. 그 후, 가끔씩, 기적의 명상을 하거나, 독서와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쓸모없는 걱정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 보다 두려움이 가끔 나를 무섭게 만들기보다 괴롭게 만드는 요즘이다.


그 동안 책을 쓰면서 너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내가 괴롭고 무서운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맨 처음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내 삶을 정리하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계획이 생기고 새로운 인생을 다시 살아간다고 행복해하였다.


그 과정에서 살아온 지난날들과, 부정적인 생각과, 부질없는 인생이 종이 위에 고스란히 담기면서 괴로운 순간들도 많았다. 빨리 휘발되는 생각에 맡기면 금방 지나갈 텐데 글쓰기가 때론 아픔을 끄집어내기도 하고 괴롭게 만들기도 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유 없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하는 사람, 먼저 연락하고 문자를 씹는 사람, 그룹 방에서는 친절이 넘쳐나다가 단 톡 방에서는 불친절한 사람, 카톡에 읽음이라는 표시가 나와 있는데도 며칠씩이나 회답을 안 하는 사람. 사실은 나도 바쁜 사람. 그러니까 내가 만만하게 보이는 사람들, 이제 그만 연락 좀. 뚝.


글을 쓰면서 느끼게 되고 돌아보는 순간, 이 모든 것이 누구를 탓하기 전에, 내가 그 동안 인간관계를 맺어온 사람 중에는 이와 같은 사람이 많았다는 게 종이위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쓰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상황, 무심하게 지나칠 번한 순간들, 그저 오늘 만은 그냥 재수 없는 하루라고 생각하였을 터였다. 그야말로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날처럼.


하지만 오늘 쓰면서, 어쩌면 다시 한 번 인간관계에 대해 더 깊게, 신중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이러다가 내가 후회할지 모르는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 정리하지 않고 쩔쩔매다간 다음에 또 다시 상처를 받는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 집착을 내려놓고 두려움과 친구하면서,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해야겠다. 내 자신을 사랑하려면, 나를 내려놓는 습관부터 고쳐나가는 게 우선인 듯싶다.


사실, 두려움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두려움은 우리의 위험을 막게 해주기 위한 보호막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두려움의 원인을 모르거나, 마음을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만들 때 글쓰기로 종이 위에 털어놓으면, 기분이 홀가분해지고 두려움의 원인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알고 보면 두려움의 문제가 별것 아님을 느꼈을 때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오히려 두려움을 경험하고 나면 더 강해지고, 지나고 나면 별게 아니다. 신기하게도 두려움이란 녀석을 직시하고 마주 할수록 도망가듯이 사라진다.


누구나 아픈 기억과 경험이 있고, 누구나 묶여있는 풀지 못한, 풀리지 않는 삶의 밧줄을 하나쯤은 안고 살아간다고 하였다. 어쩌면 그 밧줄을 풀려고 애쓸수록 잡아당길수록 집착할수록 밧줄이 풀리는 대신 더 꽁꽁 묶여 질수도 있다. 사실 밧줄을 푸는 방법은 그 흐름에 맡겨, 매듭을 따라가면 자연히 풀릴 때도 있다. 내 마음 안에 꽁꽁 묶여있는 밧줄을 누구도 풀어주지 못한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하여 살아갈 수 없듯이 매듭을 풀어가는 비결은 외부가 아닌 내면에 숨겨져 있다. 꽁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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