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별나게 입덧이 심한 나는 첫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 엄마가 위대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 구나 라는 생각을 수십 번 해 왔던 것 같다. 심한 입덧에 집안곳곳을 여기저기 기어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거의 변기통을 안고 살았다.
입덧이 아주 심각한 편이었다. 그리고는 밖에 나가는 엄마의 옷깃을 붙잡고 제발 어디든 가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남편은 돈을 벌어 와야 생계가 유지되었으므로 입도 뻥긋 못했다. 엄마의 이름은 경자, 김경자이다. 나는 매번 토하는 게 너무 괴로운 나머지 그저 무도장에 다니는 경자씨에게 매달려 어린아이처럼 떼썼다.
그럴 적마다 경자씨는 입덧은 여자들이 일생에서 누구나 겪는 고통이고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매정하게 말했다. 경자씨도 언니와 나를 임신했을 때 입덧이 엄청 심했다고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위로의 말로 받아 들여야 할지 헷갈렸다. 그러면 같은 입장에서 더 위로해주고 여자들이 겪는 그 당연함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해야 맞는 게 아닌가. 경자씨는 매번 내가 엄살을 부린다고 하였다. 아파본 사람만이 그 고통을 헤아려 줄줄 안다고 하는데 우리집경자씨는 머나먼 기억을 되돌리자니 그 고통이 긴 세월과 함께 파묻혀 없어지고 잊은 지 오래된 듯하였다.
어느 날, 잔뜩 화가 난 나는
“경자씨, 우리를 힘들게 낳아준 건 고맙고 감사해요. 경자씨의 어려운 시절에 그렇게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도 우리를 낳기로 결정하고 선택한 건 큰 용기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내가 경자씨가 겪었던 고통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힘든 과정을 통해 엄마의 위대함이 존경스럽기까지 하였어요.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현재로서 고통을 겪는 사람은 나니까 이번엔 오히려 경자씨가 내 고통을 알아봐주었으면 해요.”
평일에 부드러운 경자씨께서도 내 생각을 털어놓는 순간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면 점점 줄어드는 자신의 인생은 누가 보상해주는가에서였다. 우리를 낳고 기르고 어른이 되어서 시집까지 보내주고 지금은 또 입덧을 한다하니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면 되지, 라는 입장이었다. 입덧을 한다고 해서 대신 아파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옆에서 가만히 있는 것도 시간낭비라고 하였다. 노년에 들어와서 어찌어찌하다 취미생활을 겨우 찾았는데 자신의 인생까지 탐나는 건, 그게 딸이 할 소리냐고 덧붙였다.
“나도 그러면서 너희들을 낳았어.”
“죄송해요, 엄마.”
그랬다. 할 말이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하루 종일 집안을 기여만 다니다 보니 집안일에 손을 놓은 지 한참이 지났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 또 둘째를 낳을 배짱은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그 동안 시간이 지난 탓에 힘들었던 과정을 경험한 기억장치가 녹슬었는지 아니면 첫째를 키우니 점점 줄어드는 인생을 되돌리고 싶어서인지 모르겠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도 경자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 경자씨의 인생이 줄어드는 것에 방해하지 않았다. 혼자 끙끙 앓더라도 끝까지 견디기로 하였다. 평일에는 몰랐는데 임신을 두 번이나 하는 동안 우리 집 화장실이 저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화장실과 가까운 침실을 이용하기에는 주방도 가까운지라 음식냄새의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에너지가 바닥이 날 정도로 닳아 없어져도 경자씨의 인생이 줄어드는 것에 걱정이 되어 힘든 고비를 되도록 스스로 해결하려고 애썼다. 아이들이 커갈 수록 우리의 인생이 줄어드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짧은 인생을,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게 행복이고 삶을 맛있게 사는 비결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 온 경자씨는 이름을 바꿨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아니 멀쩡한 이름을 왜 지금에 와서 바꾸냐고 했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외할머니가 서운해 하실 것 같아서였다. 경자씨는 진짜로 바꾸는 게 아니라 무도장에서는 실명과 나이를 절대 밝히지 않는다고 하였다. 거의 다 나이를 적게 말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어이구, 모두다 나이를 줄이고 인생을 늘리려고 애쓰는구먼.”하고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랬더니 경자씨의 쌀쌀한 시선이 어느새 내 마음을 차갑게 찔러놓았다.
경자씨가 고친 이름은 김정자라고 했고 나이는 몇 살이나 어리게 말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절대로 경자라고 부르지 말란다. ㅋㅋ 그래서 내가 격렬히 반대했다. 많고 많은 이름 중에 왜 하필 정자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내가 다른 이름을, 예쁜 이름으로 지어주겠다고 하니 늦었다고 한다. 이미 무도장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파도처럼 퍼져나갔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대형무도장이라서 하루에 몇 천 명씩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정자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한참을 깔깔깔 웃어댔다. 그리고 매번마다 놀려주었다.
“정자씨, 오늘 무도장에서 마음에 맞는 난자님을 만나셨나용?”
그러면 정자씨는 때론 무뚝뚝한 표정으로, 때론 실망스러운 태도로 웃어넘겼다. 그리고 기분 좋은 날이면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좋아하셨다. 그날따라 정자씨는 역시 사람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신만의 인생을 따로 떼어내서 살아야한다고 했다. 인생후반기까지 살아오면서 어느덧 많이 줄어든 인생이, 앞으로 남은 짧은 인생을,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더욱더 절실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정자씨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툴툴 거리며 화냈다. 오늘 이상적인 춤 동반자를 만자지 못한 모양이었다. 무도장에서 춤을 청한 남자가 있었는데 같이 식사를 하자고 몇 번이나 요청을 해왔단다. 혼자가기 무안해서 친구랑 같이 가자고 말을 했더니 단번에 거절을 하더라고 했단다.
“머저리 같은 사람, 누굴 바보로 아나봐. 내가 안가길 잘했지.”라고 하면서 정자씨는 자신의 현명함을 늘어놓기도 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은 술과 도박과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해야 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3가지를 골고루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겉면으로는 평화로워보여도 이 세상은 험하고 무서운 곳이고 아픈 사람들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린 손녀딸이 할머니에게
“사람이 머리가 아프면 어떻게 돼요?”
라고 물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은 브레이크가 잘 되어있지 않아 몸과 마음을 스스로 괴롭힌다고 하였다. 밖에 보이는 상처는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면 되지만 정신이 아픈 사람들은 정신에 파스를 붙 힐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혹시나 길에서 낯선 사람이 어디로 같이 가자고 할 때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해주었다.
내 나이 마흔에 들어서면서 문뜩 깨달았다. 예를 들면 그 동안 다니던 남산공원에도 매일 다니면서 매일 같은 풍경, 매일 듣는 새소리, 매일 맡는 싱그러운 자연의 냄새도 매일매일 틀리다는 것을, 하루하루 소중하다는 것을. 매일 뜨고 지는 햇살도 그 온도가 틀리고 그늘의 위치도 제각각인 것을. 그 동안 죽기 살기로 일하고 앞을 위해, 내일을 위해 내 달릴수록 인생이 짧아지고 있음을.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을 소중하게 살아야함을.
풍요로운 시대에서 우리는 폭식을 할수록 일생의 음식을 앞당겨 먹고 수명이 짧아져가고, 잠을 많이 잘수록 깨여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음을. 그렇게 인생도 점점 더 줄어져가고 있음을, 그래서 삶이 더욱 소중하고 살아가는 매 순간이 나한테 기적임을 깨닫고 있다.
남산공원의 아름다운 벚꽃 속에 넋을 잃고 그대로 정지된 그 순간, 나는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대 자연의 풍경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아름다운 벚꽃은 떨어지는 순간에도 아름다운 자태를 잃지 않았다. 나도 저 벚꽃처럼 줄어드는 인생을 끝까지 잘 견뎌내 아름답게 생을 마감할 수 있을까? 벚꽃은 내 머리에, 손등에, 눈언저리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내 마음 속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