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끌림과 울림이란 단어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내가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러면서 문득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잘 살고 있는 걸까? 하루 동안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오만가지나 넘는 수많은 생각 중에서 나는 과연 어떤 생각에 꽂혀 있을까?’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났다.
맨 처음 탄력이 강했던 고무줄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점차 힘을 잃어가고 느슨해지듯이, 요즘의 나도 그렇게 조금씩 시들어져 가는 것 같았다.
가끔은 유튜브에서 나오는 수많은 책 속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지면서 휴대폰버튼을 눌렀다가, 화면에 뜨는 뉴스에 눈길이 끌리면서 어느새 손가락이 그 세계를 터치하고 있었다. 비록 짧은 뉴스이지만 연관되는 뉴스 속의 불안한 소식들이 잇달아 올라왔다. 그러면 다른 버튼을 누르고 또 다시 누르다보니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가 버리고 해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시간을 허무하게 보낸 기분이다. 그러다가 혹시나 그 밑에 올라오는 댓글들을 보면서 요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은근슬쩍 눈길이 갈 때도 있었는데 불평불만을 털어놓는 사람들의 하소연에 기분이 그리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길을 잃은 채, 가던 길을 다시 되돌아오는 아이처럼 굳은 결심을 먹고 다시는 블랙홀처럼 빠져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그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자신을 되찾기도 한다.
저녁에 잠들기 전, 혹시라도 어떤 생각이 떠올라 낮에 본 유튜브의 기록을 검색해보면, 내가 오늘 보고 듣고 관심이 간 내용과 소식들이 기록에 고스란히 전달되어있다. 예를 들면 오늘 하루는 뉴스를 제일 많이 본 하루라면 불안과 걱정을 달고 사는 시간을 보낸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 뉴스에 나오는 불행한 상황에, 내가 끼어있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고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서 한 시름을 놓기도 한다.
때론 건강, 사주팔자, 무의식, 동기부여의 영상들을 많이 볼 때도 있다. 마흔에 들어서면서 내가 갖는 관심분야는 어느새 건강이나 운명이나 태어난 사주로 바뀌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화면에 내가 관심 갖는 영역을 터치하면 그와 연관된 영상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옷 구매할 때도 그랬다. 내가 살 물건을 고르면 다음날, 그 다음날도 내가 관심 있는 영역에 집중하여 그 물건을 비롯한 연관된 물건들이 화면에 줄지어 나타났다.
이와 같이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내가 어제 매일 매 순간 선택하고 생각하고 행동한 모든 것들이 오늘의 나가 되고, 내일을 이어가면서 미래의 나로 만들어지듯이 내가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글을 쓰느냐에 따라서 내가 관심 가는 내용들을 알 수 있고 내가 살아간 흔적들이나 종이위의 글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와 같이 끌어당김의 힘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도 존재한다.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것들을, 기록을 통해, 내용을 통해, 글쓰기를 통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오늘의 나를 돌아보고 발견하는 하나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중에서 내가 끌어당기는 것도 있는 방면 끌려가는 것도 있다. 끌려간다는 것은 남에게 휘둘리고 빼앗기고 내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매 순간 내가 생각하고 살아간 오늘이 내가 존재하는 영역이다. 그 자리를 넓혀가고 익혀가면서 내편으로 만드는 시간과 노력하는 삶이 어쩌면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해주는 디딤돌이고 발판이 되는 계단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의 요즘 알고 싶고 내가 궁금해질 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삶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어느 날, 깊은 고민 끝에 시간의 정리, 관계의 정리, 생각의 정리를 해본 적이 있다. 최근에 들어 내가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 소통하는 사람, 이 편한 사람들이 바로 그 동안 무심하게 지내왔던 내가 요즘 배움에 갈망하고 성장하기 위해 만나는 따뜻한 분들임을 알 수 있었다. 힘들 때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동기부여가 되는 고마운 사람들임을.
가끔 그럴 때가 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익숙한 것 같은 사람인 것 같을 때, 무심하게 지나치던 어떤 장면과 풍경에도 많이 느낀 것 같은 낯설지 않은 순간들이 눈앞에 나타날 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소스라치며 놀랄 때가 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반 평생 넘게 살아오면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장면과 순간들을 포착할 때마다 사람의 운명이란 정해져 있는 거라고 굳게 믿을 때가 많다.
때문에 나는 정해진 길을 따라 가면서 사는 것이 싫다. 어디에 갇혀 산다는 생각이 숨 막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을 보면 어릴 때부터 자유분방하게 살아왔다. 나와 같은 반, 같은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교복을 벗자마자 공무원이 되거나 학교 선생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의 삶을 잘 개척해 나갔다.
하지만 나는 부러워하거나 그 중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아 일찍이 포기하고 나 혼자만의 생각과 방식과 선택으로 아무렇게나 살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겐 정해진 길이 없고 정해진 생각이 없었다. 앞에 수많은 시련과 삶의 아픔이라는 고생문이 열려있었지만, 나름대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음으로 하여 내가 겪는 고통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오늘까지 버텨오고 견뎌왔다.
그리하여 내가 오늘부터 내 삶의 지남침이 되어 외부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 끌어오는 방법을 생각하고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인생이라는 네비게이션에 잘 입력해놓고 우주의 모든 기운을 받아들일 준비와 열려있는 마음 자세를 갖추기 위해 삶의 운전대를 똑바로 잡아본다. 때론 엑셀을 밟고 브레이크를 밟아가면서 방향과 속도 조절이 필요하듯이, 내 삶을 잘 운전해나가는 방법으로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조금 더 성장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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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나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끌어당김을 내편으로 만드는 시간과 노하우를 배워나갔다. 그게 뭐냐면, 나는 매일 아침 물 컵 소원을 먼저 한다. 지구위의 70퍼센트가 바다의 물로 이루어진 것처럼, 사람의 몸속에도 70퍼센트의 물이 차지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나는 매일 아침 큰 유리컵에 70퍼센트의 물을 담아놓고 원하는 소원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입으로 말하고 종이위에 글로 쓴다. 내 몸의 세포들이 귀를 통해 소원을 듣고 입을 통해 소원을 말하고 들이마신다. 이 행동을 매일 반복하다보면 잠재의식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몸속 세포들이 그 마음과 생각을 받아들여 원하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행동에 나서기까지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매일 기적명상을 듣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선택의 결과, 내 몸속 세포들이 여러 가지의 생각과 행동이 모여서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한 총동원에 나서기도 한다. 요즘의 나를 만나고 나서 삶을 정리하는 시간들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생각과 행동이 나를 살리고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더 한층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