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태어날 때, 시어머니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사라지지 않았고, 아이를 낳느라 두 번씩이나 배를 수술한 딸이, 가슴 아파온 친정엄마는 맨 구석에서 가만히 눈물을 훔치셨다.
그렇게 작은 아이가 인생에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두 할머니를 웃고 울게 만들었다.
그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한쪽 눈을 뜨지 못하는 탓에 병원을 여러 번 찾아갔지만 똑같이 안검하수라는 진단을 받았다. 주로 유전이라고 하는데, 조부모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아보았지만 우리 집에는 안검하수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유전에서 제외하고 나면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이 있다. 바로 임신 중에 배가 너무 무겁고 큰 탓에 한쪽으로만 치우치며 눕기만 하여서 혹시나 신경이 눌릴 수도 있다는 의사의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님의 손녀딸도 안검하수인데 병원에서 태어날 때 덩치가 비교적 큰 아이라 배안에서 의사들이 꺼내는 과정에 뇌를 다쳐놓았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둘째를 출산하는 과정에서도 의사들이 모여 하나 둘을 외치며 아이를 꺼낸 기억이 난다. 하지만 정확한 원인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나 때문에 아이가 두 번씩이나 눈 수술을 받는 고통을 겪을 때마다 내가 대신 아파해줄 수도 없고, 대신 살을 떼어 줄 수 없다는 것이, 나에게는 제일 큰 고통이었다. 초등학교에 올라오면서 교정 수술을 받았다. 수술자국이 채 아물기도 전에 학교를 보내다보니 가끔은 친구들이 놀렸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아이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적절한 응급처지가 필요한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올바른 생각을 가지게 노력하려고 신중하고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썼다. 머릿속의 생각들을 긁어모아 최선을 다하면서.
“다윤아, 누구나 아픈 가시를 안고 살아간단다. 그 가시가 우리의 몸에 있을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마음에 생길 수도 있지. 예를 들면 다윤이한테는 눈이 아픈 가시인 것처럼 엄마의 아픈 가시는 치아란다.”
“아, 맞다 엄마도 어릴 때부터 이가 많이 아파서 지금은 거의 다 가짜이라고 했지? 그럼 민지의 가시는 뭘까?”
민지는 아이와 같은 반에 다니는 친구인데 둘째의 눈을 보고 놀려댔던 친구라고 했다. 외국인인 엄마가 아빠랑 이혼을 하게 되면서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다.
“음, 민지의 가시는 아마도 아빠랑 함께 살지 못하는 게, 가시가 아닐까? 가시가 비록 몸에는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 존재 할 수도 있어.”
“아, 그러네. 그러고 보니 나만 가시가 있는 게 아니었구나.”
“하지만, 가시가 있음으로 하여 우리는 그 가시를 미워하거나 부끄러워하면 안 돼. 이 세상 누구에게나 가시가 없는 사람은 없단다. 어떤 사람들의 가시는 지나간 기억 속에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의 가시는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지. 우리가 그 가시를 뽑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고통스럽고 상처가 더 많이 생기면서 오히려 곪을 수도 있단다.”
“엄마, 그러면 그 가시를 어떻게 하면 돼?”
“음, 우리는 그 가시를 더 자라나지 않게 잘 보듬고 관리하면 된단다. 나에게 있는 가시를 증오하고 한탄하게 되면 내 삶이 그 가시에 찔려 더욱 아파질 뿐, 부정적인 생각이 오히려 나를 더욱 괴롭고 아프게 만든단다. 하지만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누구나 아픈 가시가 있기에 우리는 더 노력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게 생각하면, 그 가시가 오히려 나의 일부가 되어 나를 더 성장하게 만들어주는 밑거름이 되기도 하지.”
“엄마, 땡큐. 나한테 비록 가시가 있지만 나는 엄마, 아빠, 오빠랑 이렇게 우리 가족이 함께 있는 게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 다른 친구들은 가족이 없거나, 아니면 가끔 길가에서 휠체어에 앉아 다니는 장애인들을 볼 때가 있어. 그럴 때, 우리는 가시가 있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치.”
“그래. 다윤아,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뭐가, 미안해?”
“다윤이 눈을 보면 엄마 탓이라고 생각하니까 눈물이나. 그리고 고마워. 못난 엄마 딸로 태어나줘서.”
“그게 왜 엄마 탓이야? 그리고 엄마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괜찮아, 엄마. 누구나 가시를 안고 살아가는데 다윤이 가시는 눈에 있을 뿐이야. 헤헵.”
갑자기 눈에서 나오려는 눈물을 마음속으로 꿀꺽 삼키며 작은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누가 포옹은 몸으로 표현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라고 하였던가!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가시 많은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가시가 원망스럽습니다. 가시만 없다면 저 꽃이 아름다울 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가시가 증오의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가시 많은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면, 장미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고 감사의 존재가 됩니다. 아름다운 장미가 가시를 가졌다고 슬퍼하는 마음이, 가시가 장미를 가졌다고 감탄하는 마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장미에게 가시는 본질입니다. 장미는 가시가 있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장미에게 가시가 없다면 장미는 자신의 본질을 잃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시 없는 장미는 없습니다.
-‘내 인생의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에서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가시를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가시를 생각하고 보는 시선에 따라 우리의 마음도 삶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한탄하고 원망하기보다, 가시 많은 나무에 저렇게 장미같이 예쁜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처럼, 모든 생각이 내 삶을 불행하게도 행복하게도 만든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가시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안고 사는 가시를 보고 한탄하고, 동정하고, 때로는 비웃기도 하면서 더욱 아프게 찔러놓는다. 자연의 이치와 끌어당김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긍정이던 부정이던 내가 뿌린 만큼 거두어들이는 법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외부의 가시에 짓눌리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가시를 극복하고, 견뎌내는 데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능하고 내면이 든든한 사람부터 이겨낸다. 나는 지금 어떤 가시를 달고 살아가고 있을까?
나에게는 어릴 때부터 견뎌온 가시가 있음으로 하여, 오늘도 주어진 매일 하루의 소소한 삶에 행복을 느낀다. 어쩌면 그 가시로 인해 더욱 불행하지 않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더 진해지면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아픈 가시일수록 그 가시를 뽑으려 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잘 보듬어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는 그 가시가 내 인생의 발전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고 성공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발판이 될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지나간 가시를 안고 살아가던 그 시절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무엇이라도 꼭 이루어 내고 말 것이라는 희망의 씨앗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