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과 함께 느릿느릿 공원을 걸었다. 놀이터 옆에 있는 건물 벽에 입체모양으로 된 무당벌레랑 바퀴벌레들을 커다랗게 붙여놓았다. 입체라서 더 진짜 같고 실제처럼 보이는 벌레들이 징그러워 보였다.
작은 딸이 말했다.
“엄마, 저 벌레들이 진짜 같아서 너무 무서워요.”
“괜찮아. 만약, 진짜 벌레라하더라도 쟤네들이 덩치가 이렇게나 큰 사람인 우리를 보면 더 무서워한단다.”
갑자기 남편이 끼어들며 말했다.
“저 벌레들이 얼마나 작은데 덩치가 큰 우리가 보이겠어?”
어쩌면 그 어떤 작은 벌레들이 우리와 가까이에 있을수록 우주처럼 커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멀리서 떨어져 보면 전체가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건 모르지, 아무리 작은 모기와 파리와 하루살이 같은 날벌레들도 우리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져 날아다니면 우리 몸의 전체가 보이고 우리의 육체가 조금씩 작게 보일 수도 있지.”
“ㅋㅋㅋ 그럴 수도 있겠다. 엄마, 그치.”
“그럼, 그리고 쟤네들이 오히려 우릴 보고 걱정할 걸?”
“왜?”
“음, 모든 동물들은 안전하게 기어 다니거나 네 발로 엎드려 다니는데 저 무지한 인간들만이 아슬아슬하게 두 발로 서서 다니니까. 언젠가는 넘어지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까? 차라리 기어 다니면 훨씬 편할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풋.”
우리는 재미있는 상상에 빠져 깔깔깔 웃어댔다.
모든 것은 가까이에 있을 때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더 잘 보이고 더 밝아 보이기 마련이다. 자동차 운전할 때도 그렇다. 앞차와의 거리가 가깝기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안전하다. 손난로도 그렇다. 가까이에 하면 뜨겁고 멀리하면 손이 시리다.
내가 어릴 때, 겨울이 될 때마다 우리 반 교실에 난로가 들어왔다. 난로의 따뜻한 화기가 추위에 떠는 우리의 몸을 따뜻한 온기로 데워주었다. 그러다 3교시가 끝나면 아이들은 가방에서 자신이 싸온 도시락을 들고서 너도나도 난로위에 얹어놓았다. 4교시가 끝나면 그 동안 데워졌던 밥을 먹곤 하는데 당연히 난로에서 제일 가까이에 얹어진 도시락안의 밥이 누룽지가 되기 마련이다. 그 위의 조금 멀리 떨어진 밥이야 말로 적당하게 데워진 한 끼의 따뜻한 식사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락은 잘 데워지지도 않는다.
이처럼 때론 가까이 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온도가 적당하고 딱 좋다.
책을 읽을 때도 너무 가까이 하면 눈앞이 흐릿해지고 너무 멀리 하면 글씨가 깨알같이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보다 조금 멀리 있을 때 눈을 보호하기도 하고 글씨가 또렷이 잘 보인다.
우리보다 큰 덩치가 훨씬 큰 동물도 가까이에 서면 어느 한 부분이나 일부분밖에 안보이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 있으면 전체가 보이면서 그 동물의 생김생김까지 정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산 속의 새들도 한 그루의 나무에 앉으면 한 그루의 나무밖에 안 보이지만 하늘을 날아오르면 전체의 숲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가까이에서 함께 할 때, 그 소중함을 모르고 서로 다투고 상처주고 서로를 괴롭히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보면 괜히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신경이 팽팽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매일 한 지붕 밑에서 가까이에 사는 가족에게도 편하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아픔을 마구 퍼부어준다. 그러다 회사에 나갈 때나 조금 멀리 떨어져 혼자 있을 때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돌아보고 뉘우치면서 후회하고 그리워한다. 이처럼 삶이 우리가 생각하고 조종하는 거에 따라 행복과 불행한 선택을 갈라놓는다. 가까이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적당한 온도와 거리를 유지 할 때 우리는 보이지 않던 상황이 보이고 헷갈렸던 마음과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더 선명하게 보이기도 한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도 마찬가지다. 머릿속의 문자와 문장들이 이어져 나올 때 그 순간을 마구 받아쓰곤 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서 다시 읽어보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마구 비집고 들어가고 싶은 정도로 창피하다. 고칠 것이 엄청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매일 열심히 쓰고 계속 써내려가면서 글쓰기 근육이 생길 때까지 꾸준히 쓰는 것밖에 탄탄하게 쓰고 만드는 훈련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삶에서 곳곳에 필요한 모든 것들에서 가까이 보다 조금 멀리 연습하기를 반복하다보면 매일 가까이에서 함께 부대끼며 옥신각신 살던 가족들도 더 소중해보이고 내 삶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렇게 오늘도 가까이보다 조금 멀리서 바라보니,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일에 신경을 곤두세운 내가 부끄러워지면서 나를 되돌아본다. 삶을 고쳐 쓰고 밑줄을 다시 그어야겠다고. 잠시나마 나를 반성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찰리 채플린의 명언에 이런 말이 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그러면 가까이도 멀리도 아닌 가까이보다 조금 멀리면 정상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이 비극이던 희극이던,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오늘과 내일의 나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