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첫 책을 출간할 때, 안 선생님에게, 목차를 보고 책속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애매한 부분이 있으면 원고의 내용을 설명해주면서 이런 모습으로 그려달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어딜 가나 보름달은 둥글다.’거나 ‘내 이야기 속엔 나가 없다.’이다.
얼마 뒤, 휴대폰으로 그림을 보내왔는데 나는 그만 풋, 하고 웃어버렸다.
그림속의 내 모습은 이야기속의 나와는 달리 우아하고 안락한 모습과, 편안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거기에다 상위에 와인이란 고급스러움이 묻어나, 나와는 전혀 다른 삶, 다른 모습, 다른 일상의 풍경이었다. 쩝.
한번뿐인 인생을 어쩌면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지금의 나와 비교하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조금씩 작아지기까지 하였다.
내 책속의 모습은 낯선 타향에 나와 고생을 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어딜 가나 둥근 보름달을 보면서, 편안한 소파와 달리 한강에 앉아 서러움을 토해내며 통곡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나가 없는’ 이유는, 지금까지 누군가를 위해 살았고 반평생가까이 그 누군가를 지켜주면서 내 자신을 내어놓고 내려놓으니 그 동안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모른 채 잊고 살아온 뒤늦은 후회의 삶을 담아온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주시고 예쁜 그림을 흔쾌히 지원해주신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사실 나는 그 동안 보잘것없는, 별 볼 일없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막노동도 흔쾌히 받아들이는 평범한 두 아이의 엄마이다. 그 동안 책이라는 네모난 세계를 통해 뒤늦게 삶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는 방법을 알았고, 지나온 삶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그러는 나를 바꿔나가고 한층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배움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나를 발견하는 시간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찾아내면서 시간을 내편으로 만들고 나에게 투자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조금씩 익혀나갔다.
오늘 글을 쓰면서 우연히 내 삶을, 내 주위를,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지구를 떠나 영혼이 우주에 걸려있는 것처럼. 내 자신을 잠시 분리시켜보았다.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에서 어떤 하나의 생명이 한 집안의 딸로서 두 아이의 엄마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회사의 일원으로써 그렇게 여러 가지의 배역과 주어진 역할을 맡으며, 또 하루 동안 가면을 여러 겹으로 바꿔 써가면서 무지한 삶을 평범하게 반평생 넘게 살고 있었다.
내 주위에 사는 친구나 동료나 다른 가족들을 놓고 볼 때도 그랬다. 그들은 저마다 고단한 삶에 지쳐 어두운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가하면,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루 종일 일만 하면서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줄어들지 않은 빚 때문에 한숨만 펄펄 내쉬는 가족도 있었다. 나도 그 동안 막노동을 하면서 일자리가 있다는 생각만 하여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혹시라도 이 일이 끝나기도 전에 밥줄이 끊길 가봐 불안해하였고, 아이들의 학원비용을 이어대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였다. 때론, 미리 다른 일자리를 연결해놓으면서 조마조마한 하루를 견뎌오기도 하였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감에 있어서 철학적 고민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잘사는 사람과 소소한 행복을 쌓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을 의미 있고 여유롭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내 자신이 하루하루 즐겁고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느끼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내 주위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버겁고 힘든 삶에 몸과 마음이 지쳐있다. 나를 비롯한 내 주위의 모습들이.
그래서 나부터 변하고 내 삶을 조금씩 바꿔나가기로 하면서 고단하고 고집된 생각을 버리고 그 속에서, 그 세계에서 걸어 나오기로 결심하였다. 내 인생엔 하루아침에 대박이 날 일이 없겠지만 한 순간에 쪽박이 날 일도 없을 터였다.
회사에서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려는 욕심을 내려놓으니 책 한권이라도 더 읽고 싶어졌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니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소원이 생겨났고, 비좁고 고집된 생각을 내려놓으니 열린 마음과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또 다른 나를 발견하였다. 죽음의 그림자가 내 앞에 기웃거렸을 때, 비로소 가족의 소중함과 소소한 일상이 행복이고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은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간편한 삶, 불행한 것 같으면서도 행복한 삶, 기운이 넘쳐나는 것 같은 삶에 지쳐있는 삶들을 매일 균형 있게 살아가고 헤쳐 나가는 것이 인생이고, 삶의 지혜와 기술을 배우고 익혀나가는 과정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