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일인

by 도라지

청풍호 유람선을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남편이 말했다.


"에게~ 어제 봤던 커다란 유람선이 아니잖아. 이 계단 낡은 것 좀 봐. 선착장도 오래되고 촌스럽고.."


남편의 투덜거림은 이제 으레 그러려니 한다. 나도 다른 데서 투덜거릴 때가 있다. 서로 투덜거리는 지점이 다른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뱃속으로 난 자식 같으면야 어찌 가르쳐본다고 하지만, 남편은 다른 여인의 배로부터 나온 남의 새끼다. 어줍잖게 훈계질 같은 걸 하다간, 오늘 뱃놀이고 뭐고 파국으로 치달을 게 뻔하다.


낡은 배에 올라타면서, 우리는 그 배의 가장 높은 이층의 선상으로 올라갔다. 정오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여전히 하늘엔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새 한 마리가 바람을 가르며 강물 위에 내려앉는다. 먹잇감을 노리는 갈매기였다. 바다 갈매기보다는 몸집이 작아 보인다.


"여보, 강바람이 차가울 거예요. 겉옷을 벗고, 이 조끼를 속에 입고 다시 겉옷을 입어요~"


마누라 말은 듣기 싫어하는 남편이, 구름이 짙게 드리운 하늘과 시커먼 강물을 바라본다. 내가 입고 싶어서 입는 게 아니라, 마누라가 가져온 정성이 있어서 입어준다는 식으로 생색을 내며 얇은 패딩 조끼를 속에 받쳐 입는다.


나는 두껍지 않은 트렌치코트 위에, 손에 들고 온 겨울용 롱 점퍼 하나를 겹쳐 입었다. 강바람이 매섭게 분다한들 이제 나는 두려울 게 없었다. 배가 삐삐~ 고동 소리를 울리며 출발한다.


제천 청풍리조트 옆에서 출발한 유람선은, 뱃길을 따라 단양 옥순봉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한 시간 이십 분 코스다. 이층 선상의 가장 앞자리에는 40대로 보이는 남자와 30대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모습은 정스러운데, 듣고 보니 상사와 부하 직원들 같았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배가 하얀색 물살을 일으키며 강 위를 달린다. 제법 강바람이 거세진다. 정오를 지나며 일말의 햇빛을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날씨가 점점 더 을씨년스러워지고 있었다. 패딩 조끼를 받쳐 입은 남편이, 접어 올렸던 청바지의 아랫단을 발목 아래로 펼쳐 내린다. 바짓단 정리를 얼른 마치고, 두 팔을 양쪽 겨드랑이에 끼며 잔뜩 움츠렸다.


"춥죠? 강바람이 장난 아니죠?"


마누라가 묻는 질문에, 남편이 그제야 마누라가 입고 있는 겉옷에 눈길을 주며 대꾸했다.


"당신 거는 롱 점퍼네~"


춥다는 뜻이다. 나는 얼른 바깥쪽 롱 점퍼를 벗었다. 남편이 그 옷을 잽싸게 낚아채가려 했다.


"그거 아니에요, 그건 내가 입을 거구요, 자, 이 트렌치코트로 어깨를 감싸줄게요~"


마누라가 입고 왔던 트렌치코트를 벗어서, 남편 어깨에 이불로 덮듯이 씌웠다. 그리고는 트렌치 코트 허리끈으로 아예 동그랗게 남편의 어깨 쪽을 묶어주었다. 바람에 옷이 날아가지도 못할뿐더러, 바람이 통하는 길을 조금이라도 차단시키려는 목적이었다.


후드 점퍼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마누라 트렌치코트로 어깨를 뒤덮은 남편의 모습은, 처음으로 물속에 뛰어드는 펭귄 새끼마냥 뒤뚱뒤뚱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나마 덜 추워 보였다.


관광객들을 태운 배가 단양 옥순봉을 돌아서 다시 제천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층 선상 위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아래로 내려가고, 선상 위에는 사십 대 상사 한 명과 반바지 직원 남자 한 명, 그리고 내가 남았다.


아까 그들 일행 중 남자 한 명이 선실로 내려가겠다고 할 때, 상사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었다.


"어허.. 이 정도 추위에 포기하고 내려갈 순 없지~"


직원 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엉덩이를 들었다. 한 명은 상사가 그런 말을 하거나 말거나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아래로 내려갔다. 반바지 남자는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붙이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선착장까지 다시 40분을 달려야 한다. 반바지 남자도 추운지 연신 다리를 문지른다. 마스크를 쓴 상사의 귀가 추위에 빨갛게 얼어 있었다. 그가 새파래진 손을 열심히 비벼댄다. 잿빛 하늘 위에선 바람에 몸을 맡기며, 독수리처럼 날개를 활짝 편 갈매기 한 마리가 바람을 타고 원형으로 비행을 한다.


이층 선상에 나를 포함하여 세 명이 남은 걸 확인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관광객들이 많았을 땐 자리에 앉는 게 매너지만, 이제는 배의 앞쪽만 아니면 어느 공간에 서 있어도 무방했다. 앞쪽에 앉아있던 사십 대 남자가 내쪽을 흘깃 바라본다. 마치 여자에게 질 수는 없다는 것처럼, 그 남자의 안경 너머엔 경쟁자의 오기 어린 눈빛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제 아무리 건장한 사내들이라 해도, 겨울용 롱 점퍼를 입고 모자까지 뒤집어 쓴 여자를 당해낼 수는 없는 날씨였다. 갑자기 귀에서 "쌔애앵~" 바람 소리가 요란해지고, 배가 흔들린다.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하늘은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선착장까지 20여분을 남겨 놓고, 상사와 반바지 남자 두 명이 시퍼레진 얼굴로 강바람에 허리를 숙이며 아래로 내려갔다.


저 멀리 청풍리조트가 보이고 선착장이 보일 때쯤이었다. 맛깔스러운 입담으로 관광객들을 사로잡던 선장님이 틀어놓은 트로트 메들리의 한 소절이 들려온다.


"인생은 딱 한 번, 한 번이다~"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하는 어느 남자 가수의 노래가 선착장 끝에 우리와 함께 닿았다. 사방이 유리로 막혀있는 선실에 피해 있던 남편이, 마지막으로 선실 문을 나오며 내게 물었다.


"당신이 최후의 일인이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배에서 내리며 마누라 트렌치코트를 벗는다. 11년 만에 10월 첫 한파였다던 어제 청풍호에서였다.


(2021년 10월 17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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