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풍경(하)

by 도라지

며칠 전 그날은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법정에 들어서기 전 모니터를 주욱 훑어본다. 사건번호 스무 개가 적혀있다, 사기죄, 협박죄, 상해죄, 폭행죄, 점유물 이탈 횡령죄 등 다양한 사건들이 이십여 개가 되는 걸로 보아, 오늘이 선고일인 사건들이 대부분일 것 같았다.


내가 모니터링을 맡은 사건은 협박죄와 주거침입죄의 두 가지 공소 사실로 기소된 하나의 사건이었다. 서로 가정이 있는 남녀가 만났다가, 한쪽이 이별 통보를 하면서 시작된 사건이었다.


두시 재판이라고 명시가 되어 있어도, 해당 사건이 정확히 몇 시 몇 분에 진행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리 법정에 들어가 필기가 가능한 맨 앞자리를 탐색했다. 이미 만석에 가까운 법정 안에, 접이식 책상 자리가 딱 한 자리 눈에 들어온다. 그것마저 놓칠세라 재빨리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자리에 앉는데,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저씨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아이코, 잘못 앉았구나 싶었다. 옆으로 돌아서 그의 얼굴을 확인하거나 하는 불필요한 동작들은 가급적 삼간다. 법원 활동을 다니면서 깨우치게 된 또 하나의 생존 기술이었다.


"사람은 배워야 혀~ 배워야 하고 말고."


내가 그의 옆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판사가 들어오고, 모두가 일어나서 판사를 향해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사건번호가 호명되고 피고들이 피고석에 들어섰다가 선고를 받고 퇴장할 때마다, 그는 계속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아이고, 1년형을 받았네~ 것도 실형이네."

"뭐여? 고작 6개월이여? 그것도 집행유예?"

"저 아줌씨는 좋겠네~ 벌금으로 끝났으니. 그럼 나는 얼마나 받으려나?"


혼자서 자꾸만 중얼거리는 소리가, 저쪽에 앉은 법원 직원의 귀에도 들렸나 보다. 이쪽으로 와서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준다. 그런데 별안간 방청석 뒷자리에서 한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재판장님, 저 사건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방청석 뒤에서 나는 소리에, 판사가 한순간 침묵하며 그쪽을 조용히 응시했다. 이의를 제기하려는 저 남자가 피고 측인지 피해자 측인지 알 수도 없었다.


"이미 판결은 내려졌습니다. 선고된 사건에 대해선 지금은 다시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9년 동안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일을 하면서 보았던 판사 중에 제일 멋있는 판사였다. 한결같이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면서, 방청객 모두가 알아듣기 적당한 음성으로 명쾌하게 설명해가며 재판을 이끌어간다. 저런 판사라면, 대한민국 법원의 정의를 믿을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법정 뒤에서 큰소리로 이의를 제기한 남자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취객 아저씨가 대뜸 나서서 그를 나무란다.


"지금 뭐하는겨? 여기가 어디라고? 판사님이 말씀하신 거 못 들었어?"


뒷사람에게 뒤 꽁지가 잘린 말투로 그가 법원 직원처럼 언성을 높였다. 판사가 어이가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법원 직원이 다시 우리 쪽으로 향해 온다. 괜히 옆에 앉은 죄로, 나 역시 황당한 시선을 함께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사건번호가 호명되고, 피고들이 들락날락거렸다. 그 와중에 내 왼쪽 옆자리에 앉아있던 한 남성이 잠시 피고인석에 서서 형량을 선고받고 퇴장하고, 그 빈자리에 파마를 요란하게 한 긴 머리의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고 와서 앉는다. 문득 돌아다보는데, 너무 짙은 쌍꺼풀 위로 현란한 색들이 눈두덩이를 덮고 있었다.


한 여인이 사기죄로 피고석에 들어서기 전까지,

아주 잠시나마 조용히 재판이 진행되는가 싶었다. 피고 여인이 집행유예기간 중 동종 범죄를 재범한 까닭으로 징역 일 년 실형을 선고받았을 때였다. 왼쪽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저 여자, 김순자 씨~ 더 큰 사기죄가 또 있습니다."


껌을 씹던 여인이 억센 억양으로 사투리를 쓰며 별안간 사기죄 하나를 더 기소한다. 여자의 뜬금없는 선포에 법정 안이 한 순간 또 술렁거린다. 다시 법원 직원이 이쪽으로 출동하고, 꼬불꼬불 파마머리 여인은 제 발로 법원 안에서 걸어 나갔다.


이렇게 정신 사나운 사람들이 재판정 안에 연거푸 등장하는 것도 처음 보는 광경이기도 하거니와, 매우 진귀한 풍경이다. 법원 직원과 판사님의 특별 주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술 취한 아저씨는 자꾸만 배워야 한다고 나를 가르치듯이 혼잣말을 해댄다. 이러다 내가 맡은 사건에 집중도 못할까 봐, 나는 혼자서 정신줄을 꽉 잡고 있었다.


차례가 되어 내가 맡은 사건번호가 호명되고, 지난번 재판에서 봤던 피고가 피고인석에 들어섰다. 판사의 말을 하나도 안 놓치려고 온 정신을 다해 집중해서 받아 적는데, 옆에 아저씨가 계속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를 흘깃 돌아보지도 않고, 판사가 내뱉는 말의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적어 내려간다. 다행히 취객 아저씨는 내 사정을 봐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가 모니터링을 맡은 사건의 선고가 끝나고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은 배워야 혀~ 내가 못 배워서 이러잖어."


도대체 누구를 향한 훈계인지 알 수도 없는 독백을 자꾸만 하는 아저씨의 술 냄새 속에는, 악하지 않은 심성이 들어있는 것도 같았다. 그 아저씨는 무슨 죄목으로 기소되어 법원까지 왔을까 매우 궁금하였지만, 나의 모니터 글을 기다리느라 일분일초가 급한 피해자를 떠올리며 423호 법정 밖으로 나왔다. 피해자가 법원 직원들이 작성한 재판 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건 며칠 뒤에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접이식 책상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취객 아저씨의 알록달록 어지러운 색상의 세로줄 바지와, 맨발로 발가락에 꿰어 신고 온 빨간색 쪼리 슬리퍼가 눈에 들어왔다.


(2021년 10월 15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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