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이제 밑져야 본전이다

by 도라지

몇 해전에 남편의 성화로 이름 있는 모 회사 돌침대 매장 하나를 운영한 적이 있다. 마누라가 돈 되는 일도 없이 집에서 노는 것으로만 여긴 남편이, 거래처 회사의 돌침대 매장을 오픈하면 마누라가 돈이라도 벌 줄 알았던가 보다.


하지만 그러한 남편의 계산이 무모했다는 것은, 몇 달 걸리지 않아 매출로 증명되었다. 이십여 년 전에나 돌침대 열풍이었지,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돌침대를 그리 사용하겠는가. 큰 손해를 보고 일 년 반도 안 돼서 문을 닫았다.


사람이 자기 직업에 따라 값이 매겨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사람들이 나에게 돌침대 사장님, 혹은 돌침대 아줌마라고 불렀다. 프리랜서로 취재 일을 할 때는, 관공서에서도 나를 이기자님이라고 불렀었다. 돌침대 매장을 하면서, 나는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돌침대 매장을 접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서울에 있는 대학의 미학과 대학원 시험을 봤다. 떨어졌다. 그리고 동네에 있는 충북대 철학과 대학원 시험을 봤다. 합격했다. 놀던 아줌마가 늙은 머리로 공부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고시생처럼 공부했다. 다시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원 수료만 했다. 아직도 논문을 못 쓰고 있다. 그런데 이십 대 대학생 시절 영문과에서 따두었던 영어교원자격증을 가지고, 나는 지금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일주일에 한 번 나간다. 스케줄도 강의 시간도 다 내가 조정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철학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물론 애써 공부한 시간은 있지만, 돌침대 아줌마 시절이나 철학 강사 시절이나 나는 달라진 게 없다. 다만 더 늙었을 뿐이다. 십수 년 전 프리랜서로 드문드문 글 쓰던 시절이나, 지금처럼 매일같이 브런치에 글을 쓰는 시절이나 나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다만 가족들 모르게 글 쓰느라, 소파에 누워 하릴없이 휴대폰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팔자 좋은 아줌마처럼 보일 수는 있다. 나는 휴대폰으로 브런치에 글 쓰는 중이다.


남편 사주에는 물이 많단다. 역마살도 있다고 들었던 것 같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더듬더듬한다. 내 사주에는 금과 토가 많다고 했던 거 같다. 역마살이 있는 남편은 바깥으로 나도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어도, 뒹굴뒹굴 오히려 행복한 사람이다. 역마살에, 급한 성질에, 단순 직진형 남편의 기질은 사고 치기 딱 적당한 조건을 타고났다.


결혼생활 이십칠 년차 부부로 살다 보니, 이제 남편의 기질적 특성과 사고 유형 패러다임을 그래프로 도식화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늙은 아줌마가 된 나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내가 먼저 남편에게 얼토당토않은 정보를 슬쩍 흘린다거나, 주말에 이산 저산 데리고 다니며 기운을 빼놓는 것이다. 이렇게 해도 또 때가 되면, 남편은 팔랑귀와 자본에 대한 욕심이 함께 작동해서 새로운 사고를 칠 기회를 엿본다. 그가 타고난 사주팔자다. 어쩔 수 없다.


가진 거 하나 없고 내세울 거 하나 없는 남편과 결혼하면서, 나는 늘 작게 살았다. 사람이 작고 하찮아서 작게 사는 건 아니다. 자리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돈으로 그 사람을 저울질하는 세상의 기준에서,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는 추 위에 올려져 있을 뿐이었다.(말하고 보니 이상하다. 저울의 추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그쪽이 더 무겁다는 뜻이다. 높은 데로 올라가는 것이 더 부자고 더 좋은 것이라는 세상의 인식때문에 내 표현이 이렇게 되었나 보다.)


그런데 그러한 삶이 이십 년 넘게 지속되다 보니, 나는 본래부터 작고 허름하게 태어난 존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남들 앞에서 고개 뻣뻣이 들고 으스대며 살 까닭을 나는 지금도 단 한 개도 찾지 못하겠다.


검찰 공무원 퇴직을 앞둔 선배가 요즘 명리학 공부에 푹 빠져있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내 사주를 묻더니, 이게 진짜 니 사주 맞느냐고 몇 번을 확인한다. 외부로 보이는 내 모습과 사주가 완전 반대라고 했다. 이게 니 사주가 맞다면, 술 그만 먹고 얼른 집에 가라고 한다. 나는 집에서 나오지 않는 두문불출 사주란다. 일찍이 자신을 알았더라면, 능히 자산어보도 쓸 사주란다. 자산어보 비유에 내가 큭큭 웃어버렸다.


이런 사주를 타고난 사람이 저런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서 산다는 것은, 사기꾼 고수이거나 삶의 시간들이 고단했다는 증거라고 했다. 그렇다고 내가 사주를 배신하기 위해 의지를 사용하여 그리 바꾸고 산 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의 거짓 허세를 맞추고 사느라, 나를 온전히 드러내고 살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글을 쓰며 온전히 나 자신이 되어본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 서면, 돌침대 아줌마 시절과 별다를 거 없이 나는 조그만 사람이 된다. 내겐 모든 사람들이 고객님이다. 고객님은 왕이고 나는 그대들을 모시는 자가 된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 속에서 산다. 이제껏 잘 버티고 살아온 내 삶은, 이제 밑져야 본전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수 있으니, 내 삶은 이제 손익분기점을 넘은 셈이다.


(2021년 10월 19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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