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와 비서

by 도라지

그를 떠올릴 때마다 언제나 따라오는 건 '처음처럼' 소주병이다. 부득이 우리가 착석한 식당과 옆에 있는 상점에서도 '처음처럼'을 팔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는 대부분 '처음처럼'을 마시곤 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그를 대신해서 옆 가게까지 가서 '처음처럼'을 구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어느 때는 내 가방 안에 '처음처럼' 세병을 미리 사서 넣어간 적도 있었다.


그런 그를 두고,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괴팍하다는 단어 말고는 달리 그를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그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그를 기인 혹은 괴팍한 노인네 정도로 취급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고인이 된 유초하 선생님은 내 술친구였다. 나는 그에게 따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으니, 스승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생전에 그도 나의 이러한 마음가짐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그는 나를 '정의의 바다'라고 불렀다. 그 사람만이 불러주는 '정의의 바다'라는 호칭이 내심 듣기 좋았다. 그와 나는 서로를 알아보고 있다는 굳은 믿음 같은 것이, 그 호칭을 통해 다시 확인되는 느낌을 받곤 했던 것 같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남녀 간에 정을 통하지 않고도 깊게 통할 수 있는 것은 '뜻'이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뜻이 통할 때 친구가 된다. 유초하 선생과 나는 뜻이 통한 사이였다. 우리는 술자리에서 친구가 되었고, 그의 마지막 시절까지 술로서 함께 했었다. 흔히들 세속적 표현으로 "내가 망하면 술친구부터 떠나간다"라고 말하지만, 술자리에서 맺어진 인연이라 해서 원대하지 못할 것도 심오하지 못할 것도 없다.


어떠한 이유로든 떠나갈 인연들을 친구라고 불렀던 이들의 회한에 동조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훗날 나를 고소하게 될 사람을 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인사의 정치적 감각에도 동조하고 싶지 않다. 진정한 친구라면 그 우정은 두 사람이 죽은 후에야 끝이 난다. 남아있는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그 우정은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유초하 선생의 죽음의 원인도 술과 담배였지만, 한 차례 큰 수술 이후로 의사가 금한 것은 담배보다도 술이었다.


2011년 6월 16일 청주예술의전당 대공연장을 대관해서 추진했던 백기완 선생님의 공연을 기획한 것도 유초하 선생이었다. 기획사도 없이 그 큰 공연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유초하라는 이름 아래 모였던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 테이블에 함께 앉아있던 어떤 사람은 2선 교육감이 되기도 하였다.


강연이 아니라 2시간 30분 공연을 위해 준비하던 5~6개월 동안, 나는 그의 비서 역할까지 도맡아 했었다. 독재정권 시절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그는 다리를 저는 장애인 신세였기에, 효율적인 업무 처리를 위해 내가 그의 운전병과 수행비서 역할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공연 준비 문제로, 대학로 근처 식당에서 백기완 선생님과 셋이서 오붓하게 식사도 했었다.


그 당시 우리는 한 명은 대학에서 철학교수로, 또 한 명은 고등학교에서 영어강사로 각자의 일이 있던 상태였다. 그 일에는 어떠한 보수도 없었으며, 그는 "공연"을 위해 사비를 적지 않게 부담했던 걸로 기억한다. 멀리서 와준 가인 정태춘은 거마비조차 사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철학교수였으면서도 술자리에서 철학 얘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우리의 관심사는 주로 정치 쪽이었다. 그의 시선을 통해 나의 정치적 시선이 일종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친구가 되기 전부터 소위 나는 은둔적인 반골이었다.


그는 술자리에서 어김없이 술값을 계산하곤 했다. 그것은 그만의 철칙이었다. 본인이 대학교수로 월급을 받는 자리에 있다는 걸, 술값을 지불해도 좋다는 지상명령쯤으로 알고 고집스럽게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충북대학교 철학교수직에서 평생을 연구자로 살던 그가 정년 퇴직을 하고 서울 본가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쯤 연락이 왔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도 모르고, 그날 나는 그의 술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늙어서 시작한 철학 공부의 대학원 마지막 학기 때였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 없어서 랑시에르의 저작 한 권을 영어 원서로 공부하던 그 학기에, 나는 온통 공부에만 미쳐있었다.


그리고 학기말 공부가 끝나고 바로 그의 부고 소식이 날아왔다. 하얀 눈이 빗물처럼 흐르던 추운 날이었다. 혜화동 장례식장에서, 그의 영정사진 앞에 서있는 백기완 선생님의 구부러진 등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옆에는 십여 년 전처럼 체구가 왜소한 채비서가 선생님을 부축하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그와 의견 차이로, 사람들이 모인 회의석상에서 그에게 심하게 불만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 중 두세 명이 화장실 근처로 다가와서, 나를 지지하는 냥 그를 험담한다. 회의 참석자들은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이었다. 나는 뜻이 통한 사람과 의견 충돌을 할 때 거침없이 발언은 하지만, 뜻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아예 충돌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동지끼리는 의견이 충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과는 의견이 충돌할 일도 없다.


장마와 폭우로 또 몇 명이 세상을 떠났다 한다. 허망한 죽음이 어디 이들뿐이랴만은, 내 친구도 아니었던 원순씨의 이십일 전 죽음은 여전히 나를 비통하게 한다.


비서라는 직함은 동지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뜻이 통하는 사람과 친구가 되고 동지가 되는 것은 상식이다. 그리고 주체적인 인간은 친구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도 상식이다.


갑질과 권력의 횡포에 대한 고발이 도덕적인 의무 내지 정의의 실현을 지나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작동하는 현실 앞에서, 오늘은 유난히 잡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세상을 속절없이 떠나버린 몇몇 사람들이 빗물처럼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는다.


(2020년 7월 30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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