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우산을 나누어 쓰기엔 우산이 너무 작은 듯했다. 몇 해 전만 해도 여기 어딘가에 엘피판 틀어주는 술집이 있었는데, 어라, 보이질 않는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 건지 골목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잠시 길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마주 보이는 선술집에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성 손님들 테이블이 보인다. 이 동네엔 주로 젊은이들이 다니는 술집이 대부분이다. 나처럼 나이 먹은 아줌마들이 손님으로 앉아있는 술집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녀도 저 술집이 싫지 않은 눈치다. 그 술집으로 들어가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앉으며 엘피판 카페를 물으니, 바로 옆집이었는데 문을 닫고 이제는 다른 가게가 들어섰다고 한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골뱅이무침과 테라 두병을 주문하고는 가게 안을 둘러보는데, 벽 한쪽에 걸려있는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주방 쪽에서 간간이 얼굴을 보이며 일하고 계신 여사장님의 얼굴이 왜 낯이 익은 건지 알게 되었다. 몇 해 전 이 골목길에서 마지막 술을 먹었던 집이 바로 이 집이었나 보다. 내가 다시 여기를 오게 될 줄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그날 먼길을 떠난다며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넸던 그에게선 그 후로 아무 소식이 없었다는 걸, 여기 다시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그녀 역시 인생 속에서 우연히 알게 된 인연이다. 세계를 적자생존의 시선으로 재단한다면, 흔히 이 사회에서 결코 강자의 자리에 갈 수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녀 역시 그러하다. 그런 그녀에게 특출한 재능이 하나 있다. 그녀는 벌써 일곱 번째 시집을 출간한 어엿한 시인이다. 그녀의 텁텁한 외모와 별개로 그녀의 영혼은 매혹적이고 뜨겁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녀의 영혼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를 알게 된 지 햇수로 육 년째 되는가 보다. 어쩌다 보니 그녀가 속을 보이는 사람이 내가 돼있었다.
그녀가 지난달까지 같이 살았던 남자는 그녀의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그녀가 몇 해 전 그 남자의 이야기를 처음 꺼낼 때도,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헤어졌다고 얘기하고 있음에도 전혀 놀라울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정의롭지 않았기에 이별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이 차이도 그리 정당하진 못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남자가 그녀의 유약한 정신 상태를 틈 타서 들어갔다는 점에서, 그들 관계는 정의롭지가 않았다.
정의라는 게 사실 대수로운 게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하다면, 고도로 날카로운 분석과 잣대를 들이대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다만 어떠한 관계든 타인을 이용하여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 개념이 약간이라도 개입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수용 가능성과 상관없이 정의가 아니다. 사랑도 정의로워야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생정신도 그것이 수단이 되고 목적이 된다면,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다.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나는 먼 길을 떠나간 옛사람에 대한 기억과 정의롭지 못한 예속 상태에서 해방된 한 여성의 삶과 마주하며 술을 마신다. 어느 날 또 비가 내릴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또 어느 먼 훗날 이 장소에서 또 다른 누군가와 술을 마시게 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비는 내리고 그녀의 둥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2020년 6월 13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