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꽃

(새로운 시작, 나는 희망한다)

by 도라지

내가 다니는, 한 시간이 채 못 되는 우리 동네 산책길의 마지막 지점에는, 여름 동안에만 도라지꽃이 피어 있다. 보라색, 하얀색 별 모양을 한 꽃들이 땅바닥에 낮게 엎드려서 피어있는 걸 보면, 내 고단한 삶이 어느새 평화로워지곤 한다.

남들이 보기엔 그다지 힘겨울 것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내 삶의 무게에 치여, 나는 도라지꽃처럼 땅바닥에 붙은 채로 간신히 숨을 쉬며 지난 삼십 년을 살아왔다. 삼십여 년 전 두 언니의 조현병이 시작된 그즈음과 남편의 일방적인 돌진 시기는 공교롭게도 비슷했다. 저마다 산책길의 의미가 다르겠지만, 나는 하루하루 내 삶을 버텨내기 위해서 삼십 년의 길을 걸었다.


어제는 작은 언니 방에 커튼을 새로 달아 주러 친정집엘 들렀다. 작은 언니가 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달아주고 싶었는데, 언니가 집으로 돌아온 지 석 달만에 커튼을 달게 되었다. 개띠라서 그런 건지 체질이 습해서 그런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해마다 여름만 되면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지쳐있곤 했는데, 이번 여름은 거진 산 송장이나 다름없을 만큼 유독 어렵게 지났다. 세끼 밥상을 차리는 것만으로도 나의 기력은 바닥이 났다. 갱년기 탓만은 아닐 것이다.


친정집은 고작 차로 삼십여 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언니 방에 커튼을 달아줄 한 줌의 기력조차 없이 그렇게 여름은 천천히 흘러갔다. 조현병으로 청춘을 상실한 두 언니의 삶과 그걸 감당하며 살고 계신 부모님을 지켜보느라, 내 심장도 어느새 병이 들었나 보다. 소위 화병이다.

요즘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머리에 가득 찬 열을 빼기 위해 무심한 시선으로 산보를 한다. 무심히 바라보는 시선 속에 들어오는 자연은 한층 신비하고 경이롭다. 노안으로 시력은 점점 더 약해지는 것 같은데, 오히려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까지 새롭게 발견하곤 한다. 삶의 기쁨은 아주 가까이에 있음을 언니들이 알 수 있기를, 나는 오래전 떠나온 천주교 신앙에 본능처럼 의탁하여 또 기도해본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기도는 멈춰지질 않는다.


내가 도라지꽃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지역 무용대회를 앞두고 소품을 준비할 때였던 것 같다. 수업을 마치고 무용실에 들어갔을 때 이미 다른 친구들 손에는 장미, 백합, 진달래, 튤립 등 예쁜 꽃바구니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리고 창가 옆으로 이름도 알 수 없는 보라색과 흰색 꽃이 섞여있는 바구니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게 보였다.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데, 그 꽃은 다른 친구들 꽃바구니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어린 마음에 속상해하고 있는 나에게 무용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꽃은 도라지꽃이야,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꽃이지. 도라지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란다~"


그해 우리 학교 무용단은 지역 예선에서 우승을 하고 서울 본선 대회까지 진출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울 대회에선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도 산책길에 때 아닌 덩굴장미꽃이 붉게 피어있는 걸 보면 이쁘다는 감탄이 절로 나오긴 하지만, 도라지꽃이 내게 주는 위로와 평화로움만은 못하다.


작년에 네이버 웹소설로 등단한 대학 선배님이 브런치를 아느냐고 물어왔을 때, 나는 브런치 잘하는 레스토랑을 아느냐고 묻는 것으로 잘못 알아들었다. 저는 그런 데 안 가봐서 좋은 데를 잘 모른다고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브런치 소개를 받고도 용기가 나지 않아 글을 올려 볼 생각도 못하고 그렇게 일 년이 흘렀다. 나는 매사에 작은 일에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도원결의의 비장함만은 못하지만, 이제껏 알 수 없는 두려움에 갇혀 살던 나는 오십이 훌쩍 넘어버린 나이에 남의 도라지 꽃밭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오늘 혼자만의 새로운 결의를 다졌다.


어제 작은 언니도 내게 물었었다, 너는 모든 게 두렵지 않냐고. 언니가 나에게 너도 무섭지 않으냐고 물어왔을 때, 그제야 언니들의 병이 두려움에 기인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보이고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작은 언니를 삼십 년 만에 처음으로 안아주었다. 년 후면 구십을 바라보는 어머니 등짝처럼 굽고 왜소해진 언니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니, 무서워하지 마,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어. 아버지 엄마 밥 맛있게 해 드리고 부모님께 착하게 하면, 그걸로 다 된 거야. 착한 딸로 살면 다 괜찮아~"


삶의 진리는 단순하다. 부모님 마음 다치지 않게 하고, 끼니마다 따뜻한 밥상을 차려드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삶은 족하다. 도라지꽃처럼 착하게 살면, 두려울 것도 서글플 것도 원망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2021년 9월 3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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