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자 도둑 16

by 도라지

한기태가 내어주는 차를 마시며, 별다른 생각 없이 앉아 있을 때였다.


"기자님은 성은희 교수랑 친하신가 봐요."


한기태는 구태여 내 속마음을 숨겨야 할 만큼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미니마 모랄리아>를 읽는 사람이라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시선이 아주 저급하진 않을 것이다. 찻잔을 내려놓고 한기태의 눈을 편안하게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친하다기보다, 작가와 기자는 일종의 공생 관계라서요. 제 직업이 그렇다 보니, 작가들과 두루 잘 지내는 기술도 필요해요."


"그럼 기자님은 모자 도둑이 누군지 혹시 아세요?"


모자 도둑~ 성은희의 모자 분실에 관심을 갖고 있는 또 한 사람일까? 아니면, 내게 정보라도 주려는 걸까? 머리 굴릴 것 없다. 또 정공법이다.


"저도 범인이 몹시 궁금해요. 교수님도 누가 훔쳐갔다고 생각하세요? 방금 전 도둑이라는 표현을 쓰셔서요~"


"저예요, 제가 모자 도둑이에요."


순간 모든 게 갑자기 평온하게 느껴졌다. 민현기와 나누던 성교의 끝에서 찾아오던 충족된 허무 같은 평온과 비슷했다. 그가 전기포트에서 다관으로 물을 부으며 독백을 시작했다.


"성은희 교수를 올해 삼월 개강 때 처음 봤어요. 유럽에서 온 아티스트, 멋있잖아요~ 대학 내 남자 교수들이 모두 성교수의 눈웃음과 콧소리를 좋아했어요. 저요? 저는 그런 타입 싫어해요. 그런데 이상하죠? 우연히 밤 산책길에 그녀를 만났어요. 여기 학교가 산속에 있고, 도시와 떨어져 있어서 밤에 정말 별들이 많이 보이거든요."


그가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찻잔을 그의 입으로 가지고 갔다.


"그날 밤에 아무 생각 없이 동행자가 되어 같이 별을 봤어요. 그때 그녀가 갑자기 내게 키스를 하더군요. 그리고 내 몸을 만지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거예요. 순간 아찔하게 넘어질 뻔했거든요. 그녀에게 에둘러 변명을 하고, 혼자서 기숙사로 돌아왔던 적이 있어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기태는 아직 성은희가 포식한 남자 명단에 들어가지 못한 듯 보인다.


"교수들 전체 회식이 있던 날, 몇 명이 노래방을 갔어요.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그 여자가 서규철 교수의 무릎에 앉아서 키스를 하고 있더군요. 내가 룸으로 들어가는데도 놀라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그가 깊은 한숨을 쉬며 다관 속 찻물을 숙우에 차분하게 부었다. 그리고 몸에 밴 것처럼 내 잔에 찻물을 따라준다. 서규철? 이름까지 명확하게 발음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숲 속 산책길에서, 그녀가 모자로 가리고 누군가와 키스를 하고 있는 걸 봤어요. 사람 심리가 그렇잖아요.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져서 숨어서 지켜봤어요. 상대는 우리 학교 남학생이었어요. 그 꼴을 보는데,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물론 그 남학생은 복학생이라서 갓 입학한 어린애는 아니었지만요."


한기태가 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자기 찻잔에 연거푸 찻물을 따라 마셨다.


"어쩌면 그 여자에게 화가 난 게 아닐 수도 있어요. 나는 나에게 분노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런 여자에게 입술 좀 뺏겼다고 분노할 리는 없고, 한기태에겐 다른 사정이 더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 책상 위에 고운 여자 사진 보이시죠? 제 아내랑 처음 연애할 때 찍은 사진이에요. 아내가 스물여섯이었을 때, 처음 만났거든요. 아내도 회화를 전공했어요. 열심히 공부해서 서른여섯에 부교수가 되었어요. 그리고 일 년 후에 죽었어요. 아내 학교 사이트에 이상한 글이 올라왔거든요."


그는 도로 냉정한 태도를 되찾은 듯 보였다. 아내의 죽음 이야기를 꺼내는데, 오히려 너무 차가워서 걱정이 되었다.


"그게 오 년 전 일이에요. 아내가 남학생이랑 연애를 한다는 글이 올라오게 되면서, 사건이 시작된 거죠. 서른일곱의 미술과 여자 교수가 스물일곱 살 남학생과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학교 내 파다했어요. 학교 게시판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시죠? 아내가 내 앞에서 이혼을 부탁했어요. 나는 화가 나서 이혼을 안 해줬죠. 아내는 학교도 그만두고, 혼자서 괴로워하다가... 그러다가 어느 날 산에서 떨어져서 죽었어요. 사고였는지 자살이었는지 그건 밝혀지지 않았어요. 산에 혼자 갔으니까요. 유서도 없었어요."


답답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한기태 아내의 죽음이 사고사였든 자살이었든, 한기태는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을 때 해줬더라면, 아내는 죽지 않았겠죠? 아내는 그 남학생을 정말 사랑한다고 했었어요. 그때는 내가 그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내가 죽은 지 오년이 됐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이해가 돼요. 사랑이란 거 말이에요~"


찻잔 속에 담기는 한기태의 눈빛이 서늘하게 슬퍼 보였다. 창 밖으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뭇잎들이 축축하게 가을 바닥 위에서 뒤엉켜 붙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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