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희와 김상준을 만난 날은 일요일 저녁이었다. 김상준은 운전을 해야 한다고 술은 마시지 않았다. 막 시작한 연인 같은 두 사람이 탄 차가 먼저 떠나고, 나는 가을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가로등에 나뭇잎들이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얼마 뒤 대훈대학교가 있는 지역으로 취재 갈 일이 생겼다. 성은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매우 반기는 목소리다. 외관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그 학교의 문을 난생처음 차를 몰고 통과했다. 어느새 붉게 물든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학교는 초입부터 스산한 분위기였다.
성은희와 조금 늦은 점심 식사를 하고 학교 주변을 산책할 때였다. 저 멀리 반대편에서 혼자 산책을 하던 키가 큰 남자를 발견한 성은희가 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여주인공이 남주인공 이름 부르듯이 크게 외친다.
"한기태 교수님~"
그러자 저만치에 있던 반대편 남자가 몇 초 뒤 어설프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성은희가 나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 남자를 향해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두 사람이 저편에서 서로 만났다. 멀리서 보면 매우 다정한 한 쌍의 연인 같은 모습이다. 나는 더디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잔디밭 위에 드넓게 펼쳐진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음침한 학교 교정 위에서도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다. 두 사람이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진영 기자님~"
그가 내게 인사를 건네는 얼굴을 보고, 그제야 그가 팬클럽 4인방 중 한 명이었던 게 기억이 났다.
"아, 네, 교수님이셨군요. 멀리 계셔서 잘 못 알아봤어요. 산책 중이셨나 봐요~"
성은희가 나의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꼬리를 확 잘라서 채가버린다.
"아이, 교수님~ 우리 둘이 식사하자고 해도 잘 만나주지도 않으시고, 이렇게 혼자 산책하면 어떡해요?"
며칠 전 김상준 교수를 대하는 태도와 완전히 달랐다. 김상준 앞에서 성은희는 여유가 있었다. 내가 김상준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이끌어가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한기태 앞에서는 무언가 초조한 느낌이었다. 내가 한기태와 말이라도 한 줄 더 섞을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한기태는 아직 완전히 그녀의 숭배자가 되지 않은 거 같았다.
그녀가 나라는 사람의 존재는 잊은 것처럼, 한기태 옆에 바짝 붙어서 둘이서 걸어간다. 오히려 그런 성은희의 태도를 겸연쩍어하고 미안해한 건 한기태였다.
"제가 두 분 산책하시는 데 공연히 방해가 된 거 같네요, 죄송합니다, 이기자님~"
"어머, 아니에요, 교수님~ 저도 지금 수업 있어서 진영씨 혼자서 박물관 구경하고 있으라고 안내해주려던 참이었어요. 우리 이따가 저녁 식사 셋이서 같이 해요~"
성은희는 나를 구실 삼아 한기태와 저녁 식사자리를 마련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한기태가 말했다.
"저는 오후에 수업이 없어요. 이기자님, 제가 박물관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성은희의 눈이 세모로 뾰족해졌다. 하지만 한기태와 저녁 식사를 하려면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성은희가 애써 웃으며 말한다.
"그럼 내가 두 시간 수업이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볼게요. 두 사람은 꼭 박물관 관람하고 있어야 해요~"
성은희가 박물관에 한기태와 나를 밀어 넣었다. 박물관은 어두운 무덤 속 같았다. 이렇게 사악하고 음산한 박물관의 기운은 처음이었다. 한기태가 재빨리 나의 기분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그만 보고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그는 자기 연구실로 나를 안내했다. 한기태는 영문학부 교수였다.
한기태의 연구실은 깔끔하고 단정했다. 현대 미국 소설을 전공했지만, 이 학교에선 영국 문학까지 다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가 놓여 있었다. 책의 제목에서처럼, 한기태는 최소한의 도덕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도르노 철학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흥미롭게 느껴지세요?"
한기태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지역 일간지 기자님들 협찬이나 따내시고 술이나 대접받는 분들인 줄 알았어요. 그렇게 생각해서 죄송합니다."
한기태는 솔직한 사람 같았다. 책상 위에는 화사하고 고상하게 웃고 있는 젊은 여자의 액자 사진도 하나 있었다.
"이기자님이 제 연구실에 방문한 첫 외부인이세요~ 제가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질 않아서요. 그런데 이기자님은 오래 알고 지낸 사람 같네요. 그냥 차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모셨어요."
한기태가 내리는 지리산 황차의 구수한 향이, 비 온 뒤 숲 속에서 나는 흙냄새처럼 연구실에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