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자 도둑 14

by 도라지

시월 첫째주가 되었다. 조우진은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했다. 구매해야 할 물품들과, 행사장과 순서에 관해선, 전화로 프리테오스에 이미 확인을 끝냈었다. 하지만 행사 전에 내 눈으로 기어이 확인해야 할 것들도 있다. 조우진이 나를 따라 행사가 진행될 홀로 들어서며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이기자님, 그날 왜 도망갔어요?"


영리한 그가, 나를 압박하기에 좋은 코너로 몰고 들어가듯이 물었다.


"도망가다니요.. 제가 왜 그러겠어요? 그냥 화장실이 급해서 뛰어갔을 뿐이에요. 저는 집에서 꼭 화장실 볼일을 보거든요.."


거짓이 꼬이면 누추해진다. 말 단추가 잘못 꿰인 걸 처음부터 직감했지만, 화장실이라니, 너무 궁색한 답을 내놓았다. 그가 얼굴이 붉어진 나를 또 은은하게 바라보며 웃는다.


"아, 그러셨군요~ 이기자님, 탱고 음악도 댄서분들이 직접 고른 거죠?"


다행히 조우진이 말꼬리를 돌렸다. 이 기획에선 고객들이 무대 위 공연자가 된다. 김경희는 팝송을 한곡 부르겠다고 한다. 장연정은 첼로를 연주한다. 서울에서 이사온 지 얼마 안되는 외과 병원 사모는, 남자 댄서를 초대해서 탱고를 추기로 되어 있다.


남편이 아닌 남자가 동행자가 되어 에스코트해주는 기획이다. 지역에 갇혀 있고 관습에 갇혀 있고 가족에 갇혀 있는 그녀들에게, 오로지 순수하게 한 여성으로서의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그러므로 에스코트는 남편이 되어선 안되었다. 그 기획 의도를 듣고, 조우진이 말했었다.


"이기자님 에스코트는 내가 하면 되겠네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조우진의 시선을 피하며, 나는 그날 관련도 없는 서류 뭉치를 뒤적거렸었다.


금요일 오후, 프리테오스에 레드카펫이 길게 깔렸다. 본인들의 공연에 맞게 알아서 의상을 입고 온 우아한 사모님들이 여배우처럼 카펫 위를 천천히 걸었다. 김경희는 그녀의 도당 청년위원장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장연정은 화이트빌더의 건축가와 동행했다. 일부러 중간중간 염색이라도 한 것처럼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슈트를 입은 건축가가, 장연정과 진짜 연인처럼 잘 어울려 보였다. 나는 그녀들의 사진을 한장씩 찍었다. 그날은 조우진도 나도 사모님들의 시중을 드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행사가 끝나고 프리테오스에서 작품이 몇 점 빠져나갔다. 조우진은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일 잘하는 내가 그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조우진이 커미션이라며 적지 않은 금액을 내 통장에 입금했다. 내 노동보다 다소 과한 댓가였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프리테오스 행사가 끝나고 바로 이틀 뒤였다. 성은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약속된 장소에는 대훈대학교 생물학부 교수도 함께 있었다. 그는 구스토와 프리테오스에서도 본 적이 있다. 성은희의 대훈대학교 팬클럽 멤버 4인방 중 하나다.


"진영씨~ 너무 보고 싶었어요. 우리 학교에 놀러오라니까 뭐가 그렇게 바쁜 거예요? 진영씨가 안와서 내가 나왔잖아요~"


성은희가 친근함을 표현했다. 대훈대학교는 도심에서 차로 50분 거리의 외곽 지역에 떨어져 있다. 종교 단체가 설립한 그 학교의 취지는 '크게 가르친다' 라고 했다. 과연 무엇을 크게 가르치고 있는지, 배우는 학생들에게 물어볼 일이다. 교수 기숙사도 딸려 있어서, 성은희는 거기서 숙식을 했다.


"프리테오스에서 재밌는 파티가 있었다던데요~ 우진씨가 왜 날 초대하지 않았을까요? 진영씨는 갔었나요?"


성은희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린 아이처럼 입술까지 삐죽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우진씨는 내가 파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여기는 서울도 아니라서 파티도 잘 없는데.."


그랬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 가운데는 제법 국제적인 아티스트들도 있지만, 지역내 모임 수준은 한적한 변두리 지역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나도 늘 그게 아쉬웠다. 내가 쾌락주의자는 아니지만, 인생은 즐겨야한다는 데는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놀이와 향유를 하도록 태어난 존재이다.


공연히 성은희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성은희를 배제시킨 것은, 철저히 김경희와 장연정을 위시한 지역내 여성들의 편에 서기 위함이었다. 성은희에게는 무수히 많은 즐길 기회가 있겠지만, 어떤 여인들은 고작 인생에서 한두 번의 기회를 얻을까 말까다. 내가 기획자일 때는, 두루 만인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 싶다. 한 여자가 너무 많은 남자들을 독식하는 것은 그리 공정하지가 않아 보인다.


"김상준 교수님은 생물학부라고 하셨죠? 유전자 결정론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보시나요?"


얼마 전에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읽으며 생겨난 질문이었다. 생물과학 박사의 견해가 매우 궁금했다.


"글쎄요, 저는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김상준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전공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을 때, 반응은 두 가지다. 재밌는 대화 상대자를 만났다고 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쩌다 교수가 된 것처럼 전공과 관련된 화제에 흥미가 없는 사람도 있다. 김상준은 후자 같았다. 내가 다시 질문을 바꿨다.


"여자의 생체 구조가 뇌의 기능에 끼치는 영향이 있을까요?"


그러자 김상준은 덥석 미끼라도 문 것처럼, 흥미로운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여자의 몸에 관심이 없는 남자는 남자가 아니니까, 김상준은 한창 남자가 맞는 거 같았다. 키가 그리 크지 않은 김상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성은희가 말했다. 김상준은 마흔 일곱인데, 마누라 외에는 여자 경험이 없었던 거 같다고 했다. 그녀를 엄청 좋아하고 받든다고 표현했다.


성은희를 좋아하고 받드는 남자라면, 성은희가 가자고 하면 운전해서 왕복 두시간 가까이를 달리는 남자라면, 구태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성은희의 모자를 사라지게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동기가 있다. 은폐된 동기를 가진 자는 내면의 동기를 감추기위해 상충되는 표정을 짓게 되어있다. 김상준의 표정은 그냥 여자에게 넋이 나가있는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 그의 의식 속에는 일종의 행복이란 것이 분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성관계가 도화선이 되었을지라도, 김상준은 성은희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감정이 더 커보인다. 김상준도 모자 도둑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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