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곳적부터 여자는 베푸는 자이면서 동시에 기만당하는 자이기도 했다. 기만당함을 피하기 위해 남자에게 더 인색하게 굴 경우, 오히려 그만큼 더 기만당할 뿐이다. 나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진정한 쾌락의 전제는 무제한적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라고 아도르노도 말했었다. 하지만 여성에게 각인된 태곳적 불안은 무제한적인 내던짐에 이를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쾌락이 이끄는 공허에 대한 욕망과, 사랑의 신화가 이끄는 충족의 거짓 사이에서 언제나 갈등하는 존재였다.
조우진과의 은밀하지도 않은 저녁 식사 후에,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시월 첫째 주, 프리테오스 고객 행사날까지 가급적 이메일로 조우진과 소통할 생각이다. 얼굴을 보지 않고 음성으로만 전해 듣는 통화는 오히려 더 자극적이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전화 통화보다 문자 소통을 더 선호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전화받을 때 내 음성이 퉁명스럽다고, 편집장도 늘 불만에 찬 지적을 하곤 했다.
예전에는 도심의 번화가였던 동네의 오래된 건물 삼층에 전지수의 작업실이 있다.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전지수의 남편은 중학교 미술 선생이다. 남편과는 따로 살림을 살다시피 하는 이들 부부의 속사정을,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전지수와 정무부지사와의 은밀한 만남은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다. 내 눈에도 전지수 남편과 전지수는 어울리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전지수의 허기진 영혼이 애처롭다고 생각이 들 때쯤, 전지수와 정무부지사가 눈이 맞았다.
추석 다음날이었다. 전지수 작업실에서도, 전지수의 속적삼같이 뽀얗게 반질거리는 보름달이 훤히 올려다보였다. 전지수는 무당처럼 신기 어린 눈빛을 가지고 있지만, 아주 드물게 매우 솔직할 때가 있다. 제 살을 다 내놓은 보름달처럼 허울 없이 민낯으로 나를 대할 때도 있다. 달빛 탓인지, 흐르는 음악에 취한 탓인지 전지수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이기자는 남자랑 연애할 때 어딜 봐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한참을 생각하게 된다. 민현기 이후로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팔 년 전 민현기를 처음 만났던 날과, 그 남자와 키스했던 그날을 떠올려본다. 내가 그 남자의 무엇에 끌렸더라? 나는 그 남자의 어디를 봤었지?
"눈을 봐요."
내 대답이 식상하다는 듯이, 전지수가 특유의 상냥한 듯 신경질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남자의 하체를 봐요. 무릎 아래 말고 위로~"
전지수 남편의 기다랗게 마른 몸이 연상된다. 그리고 정무부지사의 단단해 보이던 실루엣도 덩달아 연상되었다.
"남자가 눈빛이 섹시하면 몸도 섹시한 걸까? 사람들이 내가 쳐다보면 조금 무섭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남자 눈을 잘 안보는 습관이 생겼어요~"
전지수가 갑자기 눈빛이 섹시한 남자에 꽂힌 기색이다. 그녀의 머리 속에 몇몇 눈빛이 섹시한 남자들이 지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다. 여자의 눈빛이 섹시하다고 몸마저 섹시한 건지는 모르는 일이다.
"섹시한 눈빛도 기호가 있는 거 아닐까요? 성적 취향이 다르듯이 눈빛에 대한 취향도 다를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저는 소통이 되는 눈빛을 좋아하는 것뿐이에요."
그러고보니, 나는 남자를 두 부류로 나누고 있었던 것 같다. 언어적으로 소통이 되는 남자와 소통이 되지 않는 남자의 두 부류로서 분리하고 있었나 보다. 그것을 나는 '눈빛'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이기자는 너무 지나치게 이성적이란 생각 안들어요? 여자가 그러면 매력없어요~"
"생긴대로 살아야죠~ 흐흐,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을 한번 믿어보려구요. 작가님은 요즘 두루 만족스러워 보이세요~ 아주 좋아 보여요."
십년이 넘게 전지수와 그녀의 작품을 보아왔다. 최근 그녀의 모습이 나이와 상관없이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보여요?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아주 고민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나야 거의 별거 생활한 지 오래지만, 그 남자는 아직도 집에 가족이 있잖아요~"
정무부지사는 차기에 한 자리 노리는 야망가다. 전지수가 그랑 눈이 맞은 건, 작가들 사이에서 크게 흉 되는 일도 아니었다. 전지수는 법적으로만 유부녀다.
"그런데요, 작가님~ 성은희 작가는 모자를 찾았을까요?"
"그 여자 참 이상하더라~ 나도 바람 같지만, 세상에 나보다 더한 여자 처음이에요. 구스토에서도 프리테오스에서도 발견된 모자는 없다나 봐요. 이기자는 그 여자 어떻게 생각해요? 너무 한다는 생각 안 들었어요? 그 여자가 모자 쓰고 있었으면, 내가 그 모자에 화풀이라도 하고 싶더라니까~"
전지수는 성은희 이야기가 나오자, 정무부지사의 또 다른 애첩이라도 만난 것처럼 열을 내었다. 전지수는 성은희를 조롱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있었다. 성은희는 남자들이 있는 세계 속으로, 자신을 통째로 내던지고 있었다. 누구든 자신을 가져도 좋다고 한량없이 베푸는데, 왜 갖지 못하느냐고 세상을 향해 조롱하는 쪽은 성은희였다.
전지수도 범인은 아닌 거 같았다. 무슨 살인사건도 아니고 유명 작품의 도난 사건도 아닌 일을 가지고, 내 앞에서 저렇게 열연을 펼칠 까닭이 없다. 전지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 기분을 지껄이고 있다. 누군가의 화풀이? 전지수가 화풀이라고 말하는데, 그 단어에 내 귀가 솔깃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