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독자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말다툼을 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파란하늘이, 하이톤의 교양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그럼, 여자는 저 하나뿐이니까, 제가 남자들을 한 명씩 만나는 전개로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제가 먼저 등장을 해서 한 분을 선택하면 그분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시는 겁니다. 제 기분에 따라 순서도 정해질 것이고, 어떤 때는 양다리처럼 두 분이 들어오실 수도 있어요. 어쩌면 동시에 각기 다른 상황으로 다 만날 지도 모르구요."
연우가 듣기에 그 편이 더 재밌을 것도 같았다. 연우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남자 독자들이 수컷들의 본능을 억누르고 다시 진화된 인류의 모습이 되어 점잖게 의논을 한다. 날카로웠던 검은표범이 학자처럼 입을 열었다.
"아주 기발한 발상입니다. 남자들이란 짐승 같은 데가 더 많아서, 자칫 싸움으로 번지기가 쉽거든요. 여기에 여성 한 분뿐인 파란하늘님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편이 좋을 거 같습니다. 파란하늘님 아이디어에 동의하지 않는 분 계십니까?"
모두들 동의한다고 표시를 했다. 그러자 파란하늘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저는 호랑이님이 처음 깔아놓았던 이야기처럼 실제로 이혼을 앞두고 있는 여자입니다. 상황도 비슷하고 저의 전공도 잘 짚어주셔서, 앞서 전개됐던 저에 관한 설정은 그대로 가져갈게요. 다만 한 가지 덧붙일 게 있어요. 저는 저를 만족시키는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의 캐릭터로 가고 싶어요. 저를 어떻게 만족시켜주실지 여러분들은 그걸 고민하시면 될 거 같아요."
파란하늘이 그녀를 만족시켜달라는 주문을 걸자, 남자들의 눈빛이 다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이야기의 중심은 파란하늘이다. 연우는 파란하늘과 남자들이 앞으로 전개시킬 이야기들이 기대가 된다. 두 번째 모임날은 이렇게 끝이 났다.
연우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작업실 건물 앞을 지나가는데, 작업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수현이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연우야, 니가 먹던 와인 내가 먹었다~"
"네."
수현은 가끔 연우 작업실에 와서 혼자 술을 마셨다. 와인을 좋아하는 연우 작업실에는 늘 와인이 있었다. 수현은 맥주를 사들고 와서 와맥을 마시곤 했다. 맥주를 먼저 따른 컵에 와인을 넣어야 한다. 와인을 먼저 따른 컵에 맥주를 넣으면 맥주 거품이 더 크게 부풀어 오른다. 와맥은 거품이 지저분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수현과 범준은 섹스를 해결해야 하는 일로서 생각한다.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요청을 계속 거절하다 보면, 쓰지 않는 기관은 자연스럽게 기능을 상실한다는 주장이었다. 거기에 사랑이니 열정이니 그런 감정 따위 개입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일은 매우 중요하고 신중해야 하는 일이었다. 질병 발생의 위험이 있으며 임신 후 낙태는 생명과도 연결되는 일이다.
범준은 특히나 섹스에 대한 철학이 확고했다. 범준은 원래 비혼주의자였다. 그의 섹스 철학을 충분히 이해한 와이프가 범준의 결혼 승낙을 얻기 위해 손목까지 긋는 자살 시도 사건이 발생했었다.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겠다는 와이프를 살려 범준이 결혼을 했다. 그리고 범준은 와이프에게서 딸을 하나 낳았다.
와이프와 의견 합일 후 범준은 정관수술을 자발적으로 앞장서서 했다. 그리고 자녀를 둔 친구들에게 정관수술의 필요성을 종교의 계명처럼 설파했다. 몸에서 발생하는 화학 작용은 공식을 대입하여 풀듯이 남녀가 서로의 몸을 통하여 해소시키면 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섹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과 건강과 안전이었다.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선, 남자와 여자는 우정 관계로 만나는 게 가장 합리적이며 이상적이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그렇게 범준과 수현은 십칠 년 동안 우정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십 대가 되어서도 몸의 화학적 반응으로 계속되는 특별한 우정이다.
수현은 말수가 적은 여자다. 연우보다 세 살 위인 수현의 입에서 긴 문장이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수현은 대학교 시간 강사 일을 한다.
범준은 경비행기 조종사다. 미국에 있을 때 경비행기 자격증을 따고, 거기서 경비행기 제작까지 배웠다. 연우는 범준의 제작소를 딱 한 번 가보았을 뿐이다. 범준이 지금도 계속 경비행기를 만들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범준은 어린 왕자의 작가 생떽쥐베리처럼, 어느 날 비행기를 타고 나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말하곤 했다. 수현은 이승을 떠나야겠다고 생각이 들면, 스스로 곡기를 끊어 떠나는 시간을 정하겠다고 했다. 각자가 생각하는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들마저 다른 그들이었지만, 묘하게도 한 쌍의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그들은 우정이라 말하지만, 그 우정이야말로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는 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