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아까 노래부를 때와는 사뭇 달랐다. 재즈를 부를 때의 약간 허스키한 저음이 매력적이었는데, 호랑이가 순간 당황스럽다. 사람이 뇌 속에서 구성하는 판단들이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들인지, 호랑이는 스스로 생각해본다.
여자는 검은색 린넨 셔츠블라우스에 카키와 그린, 회색이 섞인 멀티 프린트 랩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의류사업을 하는 호랑이의 눈에 완벽한 코디로 보인다.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머리가 좋은 여자라고 호랑이는 생각한다. 아까 순간적으로 들었던 하이톤 음색의 목소리에 대한 아쉬움을 그녀의 의상에서 회복한다. 호랑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여자가 앉을 의자를 뒤로 빼준다.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은 호랑이가, 겉옷의 안주머니에서 명함케이스를 꺼냈다.
"저는 신성패션의 김 00이라고 합니다. 여기 계신 분은 메라키 컴퍼니의 피에트로 바토끼씨구요, 저와는 사업적인 파트너입니다."
이태리 남자들은 사업 이야기가 오고 가는 자리에서도 여성의 개입은 언제든지 환영하는 편이다. 열정적이고 뜨겁게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삶이다.
여자가 유창한 영어로 피에트로와 인사를 나누고, 끊임없이 대화를 이끌어간다. 호랑이는 여자의 끝도 없는 매력에 포획당하는 중이다. 사업을 하고 해외를 오고 가며 숱한 여자들을 보았다. 패션쇼를 진행하고 모델들 핏팅시키는 게 그의 주된 일이다. 하지만 남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은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요즘 들어 점점 더 실감하고 있었다. 최근 몇 년간 호랑이의 눈에 띄는 매력적인 여성을 만난 적이 없었다.
여자는 자기를 그냥 프리랜서 뮤지션으로 소개한다.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그녀의 꿈은 재즈가수였다. 결혼을 하고 재즈가수의 꿈을 접었다가, 지금 별거를 하면서 다시 가수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고 했다. 낮에는 아이들 피아노 가르치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이런 데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른다.
"그럼 휴일에만 쉬시는 건가요?"
"네, 토요일과 일요일은 다 쉬어요. 평일엔 거의 쉴 틈이 없어요."
"당신을 계속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호랑이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전개되고 있을 때, 검은 표범이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호랑이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호랑이님, 그럼 이야기 속 당신은 유부남인 건가요?"
그러자 호랑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한 낯빛으로 대답했다.
"네, 저는 성공한 사업가입니다. 능력도 없이 이혼이나 당하고 싱글을 앞세워 여자에게 접근할 이유가 없어요. 부유한 사업가에게 여자는 얼마든지 따라오거든요."
연우가 생각했다. 아까 세미나룸에 들어올 때 호랑이의 그 여유로움이란, 숙제를 다 마치고 온 아이의 여유로움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호랑이는 숙제를 제 멋대로 엉성하게 끝내 놓고 부유한 자기 집의 환경을 믿고 있는 뻔뻔한 사내아이였을 뿐이다. 검은 표범이 더욱 성난 얼굴로 반박했다.
"저는 파란하늘님이 부유한 유부남 사업가에게 이용당하는 연애 이야기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연애 이야기를 해보자 했을 때, 각자 진실된 마음으로 파란하늘님과 연애를 하는 상상을 해보자는 것이었지, 돈 주고 여자를 사는 건 진짜 연애가 아닙니다. 저건 연애 이야기를 가장한, 남자적 시선의 매춘 이야기입니다."
다른 독자 네 명이 수군거렸다. 첫 번째 모임날, 연우가 세미나룸을 한 시간가량 나가 있었을 때, 독자들은 나름대로 이야기 구성 방식의 룰까지 정했었나 보았다. 적토마가 나서서 말한다.
"우리 모두가 동의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전개될 수 없다고 했던 규칙을, 호랑이님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전개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호랑이님 이야기는 조건을 갖추지 못해서, 그만 접으셔야 할 거 같습니다."
호랑이가 전혀 뜻밖의 난관에 맞닥뜨린 사업가의 표정을 지으며, 상기된 얼굴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연우에게로 보냈다. 연우는 상황을 파악하고 정리를 해야만 했다.
"이야기를 온전히 여기 계신 독자님들에게 맡겼듯이, 진행되는 규칙 또한 여러분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게 옳다고 봅니다."
호랑이는 미처 끝내지 못한 그의 단추와 유두에 대한 병적인 갈망을 담은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본 위에서 군림하는 끝도 없는 갈망은, 로맨스와 성적 환타지까지 자본으로 잡아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