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드러지게 핀 벚꽃잎들이 바람에 부질없이 흩어져갔다. 아름다운 것들은 너무 연약하다고 연우가 생각하며 다시 릴리를 찾았다. 저녁 일곱 시가 되려면 한 시간이 남아 있다.
혜화동의 오후 여섯 시는 사계절 다 창백하다.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오후 여섯 시만 되면 외로운 공연자들이 하나 둘 거리에 나타나곤 했다. 그들의 목숨을 건 투쟁 같은 버스킹을 보며, 연우는 '창백한 푸른 점'의 지구가 떠오르곤 했다. 외로이 떠도는 혼자만의 별들, 그 이미지였구나, 그래서 혜화동의 오후 여섯 시를 연우는 사랑한다.
벚꽃마저 피었다. 미치겠다. 다 외로운데 다 아름다운 오후 여섯 시다. 석양에 지는 노을마저 창백해 보인다.
연우가 와인에 치즈를 저녁 삼아 먹는다. 와인이 목을 타고 들어가며, 우주의 블랙홀처럼 끝없이 상념을 빨아들인다. 릴리의 작은 마당에 피어있던 벚꽃잎 하나가 와인잔 속에 날아와 떠돈다. 연우가 꽃잎채 와인잔을 마셨다. 멈춰있을 것 같던 시간이 흘렀나 보다. 3층 테라스에 앉아 있는 연우에게 파란하늘이 다가왔다.
"작가님은 와인을 좋아하시나 봐요~"
"파란하늘님은 알콜을 좋아하세요?"
"네, 저는 칵테일을 좋아해요. 빛깔이 무지개처럼 환상적이라서요."
연우는 <육인야화> 작품에서 상상력의 권한이 없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최대한 많이 수집될수록 좋다. 글쓰기에 유용하다.
여섯 명의 독자가 릴리 세마나룸에 다시 모였다. 오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호랑이는 제법 여유가 있는 표정이다. 나이는 허투루 먹는 게 아닌가 보다. 연우는 태블릿만 열어놓고 테이블의 가장 끝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성능 좋은 녹음기도 켜 두었다. 호랑이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이끌어간다. 곧바로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호랑이는 이십 대에 청계천에서 단추공장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단추를 단지 옷을 여미는 기능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귀금속처럼 아름다운 환상을 단추에 심어놓았다. 심미적 요소를 충족시키는 그의 단추는 이태리에서도 인정받을 정도였다. 그의 단추 사업은 의류 사업으로 확대되었다. 호랑이는 성공한 사업가이다.
호랑이에게는 은밀한 비밀 같은 것이 하나 있다. 여자의 몸 가운데 단추를 닮은 유두에 집착하는 편집증과 강박증의 혼재이다. 그는 여성을 남성의 생식기와 합해져서 일치하는 아래쪽의 기능으로만 보지 않는다. 남성을 만날 때 빳빳하게 긴장하는 유두를 상상하며 그는 남성적 활기를 되찾곤 한다.
그날도 이태리에서 온 비즈니스 파트너와 저녁 약속이 있었다. 호랑이가 리빙스턴 호텔의 다이닝룸에 들어설 때, 재즈 선율이 피아노 건반 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십대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이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했다. 너무 어린 여자가 아니라서 호랑이는 은근히 그녀가 더 마음에 든다. 호랑이는 성악을 전공했지만, 사업가가 되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여자가 높지 않은 목소리로 재즈 한 곡을 불렀다. 보이스가 매력적이다. 호랑이는 그녀의 유두가 궁금해진다. 웨이터를 조용히 부른 뒤, 칵테일과 와인 두 잔이 담겨있는 쟁반 아래에 메모지 하나를 적어 보냈다.
"당신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어울릴 음료는 무엇일까요? 어느 것일지 몰라서 칵테일과 와인 두 잔을 보냅니다."
메모를 발견한 그녀가 메모지에 정갈한 필체로 적힌 내용을 읽은 뒤에, 칵테일 잔을 손에 들었다. 아까 웨이터가 가르쳐준 방향에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남성이 보였다. 오십대로 보이는 남자가 매너 있는 몸짓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마주 보는 자리에는 외국인 남자가 한 명 앉아있었다. 비즈니스맨이라는 걸 그녀가 한눈에 알아챈다.
다이닝룸은 호텔이 직접 경영한다. 매니저라는 남자도 까탈스럽지가 않다. 뮤지션이 손님 테이블에 가서 앉는 경우는 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이미 안면이 있는 지인일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취급한다. 그녀가 자신의 연주 시간을 다 마치고, 호랑이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