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이 쉽게 가라앉질 않는다. 오전에 믹스커피 한잔 마셨을 뿐이니까, 커피의 카페인 때문은 단연코 아닐 것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이렇게 가슴이 벅차게 뛰는 걸 보니, 아마도 내가 이 책을 통해 무언가에 압도당했거나 영혼까지 사로잡혔거나 둘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나는 잠시 동안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아주 오래전, 지금과는 반대로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서 똑같은 증상을 경험했던 적이 있다. 대학에 입학하고 첫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날 왜 인문대학도 아닌 농대 앞 수풀 벤치에 들어가서, 여름날 오후 속에 쏟아지는 그 강렬한 햇살을 홀로 피해 있었던 것인지 거기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책 한 권을 빨리 읽고 싶었던 욕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뿐이다.
농대 앞에는 작은 숲처럼 우거진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내가 따로 이름을 지어 주진 않았던 것 같다. 캠퍼스의 다른 곳들은 나 혼자 이름을 지어놓고, 그 이름으로 그 장소들을 부르곤 했었다. 하지만 인문대와 비교적 거리가 멀었던 농대 쪽에는 어떠한 장소에도 이름을 지어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여전히 그 작은 숲의 느낌과 햇살의 촉감을 기억할 수 있는 건, 그날 우연히 발견한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충북대 정문 앞에는 작고 오래된 책방이 하나 있었다. "민중 서점" 아니면 "샘터 서점"이었던가.. 두 개의 이름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지만, 그 책방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또렷하게 기억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건 책방 안에 새로운 교재들 옆으로, 낡은 책장 한편에 꽂혀있던 묵은 책들의 냄새다. 가끔은 책장 깊숙한 데 숨어 있던 먼지가 빠져나와 간간이 나뒹구는 모습마저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들어간 책방에서 우연히 나의 눈에 들어온 책 한 권이 있었다. 장 그르니에가 쓴 <섬>이라는 책이었다. 낡은 책장 속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던 먼지 묻은 책 한 권에 나의 시선이 멈춰버린 그 순간, 나는 잠시 그 앞에 정지해 버렸다. 손을 뻗어 책을 집어 들던 그 순간의 감촉이 지금도 생생하다. 얇은 비닐의 감촉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책의 첫 장을 열었다. 아직 첫 페이지를 다 읽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내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운명적인 조우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단숨에 그 작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
운명적인 사람은 인생에서 그리 자주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장 그르니에 이후로 그런 조우는 다시 없을 줄 알았다. 그르니에를 알게 된 후 삼십 년이 지나서, 또 한 번 그런 황홀함에 사로잡히게 될 거라고는 전혀 기대조차 하지 못했었다.
랑시에르를 처음 만났던 몇 해 전, 나의 지성은 어리고 유약해서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도 고양된 지성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번엔 무언가 달랐다. 몇 해전 알게 되었던 사람을 우연히 다시 만났는데, 예전과는 다른 어떤 매력을 그에게서 보게 된 그런 기분이었다.
<무지한 스승>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는 동안, 그것은 마치 한 사람에게로 향하는 고독한 사랑의 여정처럼 자꾸만 목이 말랐다. 그에게 다가갈수록 더욱 매료되고 마는 흔한 사랑의 증세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에게 한발 다다랐다고 여기는 그 순간조차도, 나는 끊임없이 그를 향해 목말라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스무 살의 어린 내가 첫눈에 그르니에의 글에 빠졌다면, 오십 넘은 나는 천천히 한 사람의 글을 음미하다가 결국 랑시에르에게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나이에 따라서 마치 이성에게 빠지는 시간과 방법이 다른 것처럼, 책에 빠지는 속도와 방법의 차이도 그것과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스무 살도 아닌데, 다시 여름이 시작되려나 보다.
(2020년 5월 22일 씀)